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 나의 오래된 복병이 도졌다. 우려했던 부분이었지만 스멀스멀 다시 자리 잡을 줄이야. 매주 토요일 연재라는 글자키를 누르면서 살짝 불안했는데 역시 나는 일주일 내내 키보드 자판 한 번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한 주 동안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거의 매일 정독하면서 감동하고 자극을 받아 계속 like it을 누르고 댓글도 달았다. 머릿속에서는 이제 정리해서 내 글을 써야지 생각했지만 그동안 미뤘던 아이의 미술학원 선생님 상담과 미술활동보고서 작성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일들의 목록 작성하기, 여름 방학 동안 필요한 활동을 꼼꼼히 정리해 두기, 아이가 미술 관련 책들을 많이 못 읽을 것을 대비해서 미술 독서를 선정하고 내가 미리 읽어 블로그에 정리해서 올려두기 등등 쉴틈도 없이 글쓰기과 상관이 없는 다른 일들만 찾아서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미루기 흑역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결혼 전 회사에 다닐 때 본격적으로 발현되었는데, 내가 하는 일은 회사 사보를 만드는 일이었으므로 월초에는 다른 일을 하면서 한가하게 지내다가 월말 마감 직전에 미친 듯이 일을 하곤 했다. 자료조사와 인터뷰는 미리 해두어도 원고를 정리해서 쓰는 것은 왜 그랬는지 꼭 마감 직전에 했다. 그런데 이 마감이라는 것이 기획사에 원고를 전해 주는 최종의 시간을 말하는 것인데 어느 날 나는 미루고 미루다 인쇄를 위한 필름 출력 전날 새벽까지, 그것도 기획사 사무실에서 원고를 쓰고야 말았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는데 디자인 다 마쳐 놓고 원고 택스트만 넣으려고 잠도 못 자고 기다리고 있는 기획사 직원들한테 너무 죄송해서 등에서는 땀이 줄줄 흐르고 타이프 치는 속도는 미친 듯이 빨라졌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때의 느낌을 생생히 기억한다. 마감의 마법. 초인적인 힘에 휩싸인 듯 집중력이 극대화되는 놀라운 순간을 경험했던 것이다. 머리에 열이 나는 듯하면서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다른 누군가가 대신 글을 써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정신 차리고 읽어보니 정말 잘 썼다! 그 이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며 싸이코 같은 미루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미루기는 습관처럼 계속되었다. 아이들이 자라고 나서 새로 시작했던 일이 중등 인강 학습관리 선생님이었는데 이 일이 공교롭게도 매주 학생 상담 마감과 매월 학부모 상담 마감이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월초부터 찬찬히 해두면 편하고 여유로울 것을, 나는 학부모 상담을 꼭 말일까지 미뤄 놓고 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다. 결국 말일에 전화가 안 되는 학부모께 밤 10시가 넘어 전화해서 "어머니~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하며 12시 자정 직전에 가까스로 마감을 하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러고 사는 건지 현타가 올 무렵, TV에서 한 아나운서가 밝게 웃으면서, "미루기가 꼭 나쁜 건 아니에요. 저는 일을 미루고 한꺼번에 할 때 더 효율적으로 잘합니다. 집중력이 높아지거든요."라고 말하는데 그 아나운서의 이름과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고 반가웠다. 나만 미루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오랫동안 이 미루기로 인해 스스로를 괴롭히고 질책했던 것을 이제는 그만해도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식이 다를 뿐,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미루는 것을 죄악시하고 게으른 루저 취급을 하며 '더 빨리, 주저 없이, 계획한 대로 나아가라.' 고 쉴 새 없이 다그치고 심지어 미루기를 '시간 도둑', '끔찍한 범죄'라고도 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위인들이 끝도 없이 미루기를 하면서 오히려 놀라운 업적을 쌓았다는 것을 <미루기의 천재들>이란 책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었다.
무려 20년간 봉인된 세기의 발견, 찰스 다윈 <종의 기원>
"모든 종은 변화한다" 찰스 다윈은 1838년 여름, 이 세 어절로 된 단순하지만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문장을 노트에 적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종교적 믿음을 산산조각낼 이 발견이 세상에 알려진 건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였다. 그 기간 동안 다윈은 과학 학술지에 논문을 보내지도, 대중매체에 글을 싣지도, 책 집필을 하지도 않고 미룬 채 다른 일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거의 8년 동안 "내 사랑 따개비"라고 부르며 따개비 연구에 강박적일 정도로 온 시간을 쏟았고, 결혼 후 시골에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손이 아플 만큼 바쁘게 쉬지 않고 글을 썼으며 지렁이 연구를 계속했다. 1859년 마침내 <종의 기원>을 출판하고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고 이름이 알려진 뒤, 다윈은 그렇게 오랫동안 미루고 꾸물거린 것이 스스로도 당혹스럽다고 고백했다. 다윈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고 꼼꼼하고 철저한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발견한 것을 세상에 알리기까지 그토록 오래 기다린 걸까? 아니면 애초에 책을 출간하기가 귀찮았던 걸까? 일을 미루는 것과 게으름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윈은 게으름을 매우 싫어했고 하루를 15분 단위로 나누어 계획을 세우고 활용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책을 출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다윈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의 목록 중 가장 중요한 일을 최대한 미뤄둔 이유는 중요한 업적을 명료하게 이해하고자 했던 과학자의 합당한 책임감 때문이 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저마다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어떻게든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다윈이 따개비와 지렁이 연구에 오랫동안 지나치게 집착했던 것처럼.
미루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83년 밀라노의 무염수태 성도회가 예배당에 걸어 놓을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그림을 그림을 제작해 달라는 부탁에 7개월 만에 그림을 그려주기로 약속했지만 이 그림이 완성되어 예배당에 걸린 것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후였다. 이 사건은 레오나르도를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루기의 거장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이에 대해 처음으로 레오나르도의 전기를 쓴 조르조 바사리는 그의 완벽주의가 문제였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는 많은 일을 벌였지만 자신이 상상한 것을 그대로 구현할 완벽한 기술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하는 레오나르도에게 실망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그 무엇도 끝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계속 미루면서 주변을 실망시켰던 그 시절 레오나르도는 미학, 해부학, 천문학, 공학을 넘나들며 모든 분야에서 놀라운 천재성을 보였다. 레오나르도는 사실 무염수태 성도회의 예배당에 걸 그림을 비교적 빨리, 몇 년 밖에 안 미루고 완성했으나 형편없는 보수에 모욕감을 느끼고 그림을 간직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팔았고, 그 그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 레오나르도에게 복수를 당한 무염수태 성도회가 다시 그림을 요구하자 제안을 승낙하고 그림 작업에 재착수한 레오나르도는 이번에는 15년이나 걸려서 그림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현재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있다. <미루기의 천재들 中> 레오나르도의 미루기에는 이처럼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암굴의 성모. 루브르 박물관 암굴의 성모. 런던 내셔널갤러리
"하지만 아직은 아니옵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
신약성서는 언제나 서둘러야 하며 참회처럼 중요한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훈계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께 순결을 달라고 기도하며 "하지만 아직은 아니옵고."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성인도 미루기를 하지 말라는 훈계를 따르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들이 번듯하게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15년간 연애를 하고 결혼은 하지 않은 채로 그 여성과 아이까지 낳았다. 그의 저서 <참회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제멋대로 살았던 것과 어머니가 그토록 기도를 하셨는데도 개종을 미뤘던 것에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주여, 당신을 너무 늦게 사랑했나이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거의 15년 동안 <창세기> 연구에만 매달렸다.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다른 일을 시작하라는 친구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끝내거나 출간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원죄의 개념을 심어준 아우구스티누스가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망 이후 그의 작품의 거의 2000년 동안 읽히고 연구되었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만일 그가 미루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일찍 받아들이였다면 진정한 참회가 가능했을까 하는 대목이다.
미루기의 거장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미루기를 하는 사람들이 하려는 일이 대부분 진짜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일을 미루는 사람들이 자기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작업 과정에 머무르는 동안은 완벽하게 해낼 거라는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핑계를 대고 미루면서 그 과정을 최대한 늦추려 한다. 진짜 목표는 일을 마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원하는 최상의 목표를 추구하려는데 있다. 하지만 미루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 그 미루기의 끝자락에서 결국은 해야 할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세포과 감각들을 불러일으켜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집중력의 방호복'을 단단히 입히고 촉각을 다투는 시간의 압박과 끝내는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이겨내며 끝마쳐야 한다. 미루고 미루었던 일들을 결국은 해낸다. 미루지 않았을 때보다 더 훌륭하게!
우리 앞에는 재빨리 해치워야 할 일이 있다. 이 일을 미루면 파멸이 닥치리라는 걸 안다. 우리 삶에 가장 심각한 위기가 닥쳐오고, 그 위기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즉각 에너지를 내어 행동하라고 명한다. 우리는 달아오르고, 작업을 빨리 시작하고픈 열망에 사로잡힌다. 우리의 영혼은 영광스러운 결실을 기대하며 온통 불타오른다. 그 일은 반드시 오늘 끝내야 하지만 우리는 일을 내일로 미룬다... 마지막 순간이 머지않았다. 우리는 우리 안의 격렬한 갈등에, 한계 없는 한계에, 어둠을 지닌 본질에 전율한다. 하지만 지금껏 이어져온 경쟁의 승리자는 어둠이다. 우리는 부질없이 몸부림친다. 시계는 종을 울리고, 종소리는 행복을 끝을 알린다. 또한 종소리는 우리를 그토록 오랫동안 억누른 유령에게 밤의 끝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기도 하다. 걱정은 날아간다. 사라진다. 우리는 자유다. 예전의 에너지가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지금 일할 것이다.
아아. 하지만 너무 늦었다! <미루기의 천재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