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핸드폰을 바다로 내동댕이 친 후 윈디와 재스민은 나와 연락이 두절되었다. 내가 어떤 소셜미디어와도 소통을 안 했기 때문에 그들은 답답한 마음에 우리 집에 전화를 하였고 내 소식을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여름방학이 끝난 후 사랑의 결실을 맺은 34살 수학담당 혜리 선생님은 24살 영국 선생님 Jack의 고향에 다녀온 썰을 내게 풀기 시작했다. 드넓은 푸르디푸른 들판에 체크무늬 담요가 펼쳐 저 있었고 그 위에 앉은 그녀는 Jack이 수줍게 내민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실연의 아픔에 허덕일 동안 이 선생님은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구나.
산다라 박을 닮은 그녀는 동안이었을뿐더러 표정과 언행에 발랄함이 넘쳤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중국에 처음 온 그날 36살 노총각 체육선생님과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사고 있었던 마트에서였다. 나는 체육선생님과 가는 곳마다 학생들 학부모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도 발각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놀리듯 대했다. 체육선생님에게 "오~~~ 여자 친구?" 이러면서 장난을 쳤고 "잘 어울려요!"라고 외치며 도망갔다.
이곳은 정말 좁구나... 오전 반나절 같이 있었을 뿐인데 나와 그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전 학교 학생과 학부모님들을 너머 원어민 선생님들 귀에까지 전달이 되었다. 이런 손바닥만 한 곳에 9살 차이 나는 한국 노처녀 혜리 선생님과 영국 Jack 선생님의 연애는 한국 아줌마 선생님들 도마에 오르기 십상이었다.
혜리 선생님은 Jack 앞에서 매사에 당당했다. 하루는 그녀의 집에 놀러 갔는데 울고 있는 Jack을 발견했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는 본인 계약이 Jack보다 3달 먼저 끝나서 한국에 먼저 가있고 3달 후 계약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라고 했더니 죽어도 안된다고 한 달이던 일 년이던 본인은 혜리 선생님과 떨어져서 지낼 수 없다며 세상 끝난 듯 저렇게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Jack이 동료 교사인 내 앞에서 마저 쪽팔린 줄도 모르고 그녀의 맘을 돌리기 위해 애걸복걸하는데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그가 선물한 장미꽃이 담긴 화병을 툭툭 치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선생님! 선생님은 원 없이 연애를 해봐서 감정조절이 잘 되는 거 알겠는데 Jack은 아직 어리고 선생님이 첫사랑이라 정말 이러다 선생님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애달파하는 이 맘 안 느껴지나요?! 물론 성숙한 행동은 아닌 걸 알지만 생각해보면 선생님도 어릴 때 이런 적 있었잖아~ 남인 나도 안쓰러워 죽겠어" 내 말을 들은 혜리 선생님은 억울해하며 내게 말했다.
"클라라 선생님! 나라고 처음부터 이랬겠어요? 첨엔 나도 안쓰럽고 미안해서 같이 손잡고 울었어요. 근데 난 진심 Jack이 결혼 전 나 말고 다른 여자들도 만나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없지. 지금이야 내가 전부인 거 같지만 그게 아닌 거 선생님도 겪어봐서 잘 알잖아요? 나는 내가 겪은 모든 경험을 그도 똑같이 경험해봐야지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Jack이 나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것은 좋은 게 아니야~ 사랑은 길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길어. 나는 그가 그의 인생에서 정말 결혼만큼은 죽어도 후회 없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진심이었다. 학교 안팎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은 그녀가 어린 Jack을 놓아주지 않을 거고 혹시라도 깨지고 나면 그녀는 더 늦은 나이에 다시 언제 인연을 만날지 걱정된다는 우려가 대부분이었다. Jack이야 어리고 잘생기고 능력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면 그에 맞는 인연을 쉽게 찾을 거고 늙어서 별 볼 일 없어지는 건 그녀라는 것이었다.
내겐 그녀가 그토록 진절머리 났던 속된 사회의 통념을 깨부수는 진정한 여성상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선 결혼은 하나의 생략 가능한 절차에 불가했다. 그녀는 그렇게 당당하게 자라왔고 오랜 연애를 통해 그렇게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Jason과의 진흙탕 이별 후 사경을 헤매는 나를 오랫동안 묵묵히 지켜보던 그녀는 어느 날 사우나에 나를 데리고 갔다. 그녀는 기분전환을 시켜준다며 이 탕 저 탕 정신없이 나를 넣다 뺏다 했으며 내 얼굴에 혈기가 도는 걸 확인하며 이번에는 비타민을 먹이려고 어마어마한 양의 귤을 까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그녀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도 선생님처럼 임용고시 3년을 준비했었어요. 나는 학벌도 스카이라서 부모의 기대가 엄청나게 컸거든. 근데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내 남자 친구가 나보다 먼저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버린 거야.. 뭐 결국 나는 혼자 고시원 생활을 해야 했지. 그런던 중 내 생일날 그는 회식이 있다며 연락두절이었지. 나는 근래 달라진 그의 태도와 내 생일을 기억도 못하는 그가 서운해서 그의 집 앞에 서서 내리는 눈을 펑펑 맞으면서 그를 기다렸어. 오기만 해 봐라! 이러면서... 근데 그날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외박을 한 거지."
"다음날 남자 친구는 나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미안하다며 이별을 고했고 나는 반쯤 미쳐서 날뛰었어. 매일 밤 그의 집에 찾아가서 빌었고 받지 않는 전화를 수백 통씩 했었지. 정말 제대로 미쳐 버리 거야. 나는 그 정신상태로 공부를 더 지속할 수 없어서 임용고시도 포기했어.
그리고 1년 후 친구랑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있을 때였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그 사람이었어. 그 순간 선생님.. 혹시 살면서 세상이 정지됨을 느껴본 적이 있어? 미치도록 그립고 미워하고 저주했었던 그가 드디어 나에게 전활 걸어 나를 만나고 싶어 했어. 커피숍에서 우린 재회했고 그가 날 보자마자 한 행동이 뭐였는 줄 알아요?"
"다 큰 남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면서 울더라. 미안하다고 그렇게 30분가량을 계속 울더라. 근데 내 눈엔 우는 모습이 어찌나 궁상맞고 없어 보였는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그를 향한 미련 따윈 사라지고 없었어. 나는 그를 겨우 겨우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냈지. 그 후론 그에게 연락 한 번을 하지 않았어."
"선생님! 누구나 지나간 사랑은 있어요~ 중요한 건 그 사랑을 통해 내가 얼마나 성숙한 인간이 되느냐야. 남자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똑같아요. 선생님과 내가 만나서 위해주고 서로로 알아가듯 사랑도 결국 그런 거야.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해. 내가 그 사람을 통해 덕보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가진 행복을 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서 땡잡았다 생각되는 인간관계는 지속하지 않는 게 좋아. 결국 그 사람에게서 좋아 보였던 게 없어지면 내 마음도 변하게 되어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