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6월 9일

見乃梁破倭兵狀(견내량파왜병장)

by 지온x지피

初九日丁未。晴。直到天城加德。則無一賊船。再三搜見。旋師還唐浦。經夜。未曉。發船到彌助項前洋。與右水使話。



1592년 6월 9일, 맑음

오늘은 아침부터 맑은 하늘이었다.
우리는 곧장 배를 타고 ‘천성(부산 가덕 천성동) 가덕(부산 가덕 성북동)’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적의 배는 단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세 번이나 샅샅이 살펴보고 수색했지만,
끝내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아쉬운 마음을 안고
함대를 돌려 ‘당포’로 돌아왔다.
밤새 이동했고,
아직 동이 트기 전 어둠 속에서
다시 배를 띄워 ‘미조항 앞바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오른쪽 수군을 지휘하는 우수사(이억기)와 만나
군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1592년 6월 10일부터 8월 22일까지,
이 시기의 《난중일기》에는 단 한 줄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순신 장군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바빴고,
일기를 쓸 여유조차 없이 전쟁의 한가운데를 헤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치열한 나날들은 《견내량파왜병장》이라는 장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글 한 줄 한 줄에서, 장군님의 분투와 무거운 책임감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592년 7월 13일에 조선의 국왕 선조에게 올린 공식 전투 보고서입니다.

이 문서에는 7월 8일에 벌어진 한산도 대첩과 7월 10일 안골포 해전의 전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수많은 적선을 격파한 내용과 장수들의 공적, 그리고 전투 후 조선 수군의 움직임까지 세밀하게 담겨 있습니다.




見乃梁破倭兵狀(견내량파왜병장) 현대어 해석



선조께 삼가 아룁니다.

왜적을 물리치고 목을 벤 전투의 결과를 상세히 보고드립니다.

전하의 명이 도착하기도 전에, 경상 해안에 출몰한 왜적들이 동쪽 바닷길을 따라 각지에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사천, 곤양, 남해까지 침입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전라도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 우수사 원균과 공문을 주고받으며 협력하였고, 단독 또는 연합작전으로 왜적을 추격하고 격파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6월 10일 진영으로 돌아온 바 있으며, 이후 전하의 명을 담은 공식 문서가 순찰사를 통해 도착하였습니다.


가덕도와 거제도 일대에 왜선이 많게는 30척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고, 금산 지역에도 왜적의 기세가 솔개처럼 퍼졌습니다. 수군과 육군이 나뉘어 각지로 침입해 불을 지르고 공격을 계속했으나, 우리 군사는 전혀 없던 상황이라 침입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에 전라도 수군과 함께 7월 4일 저녁, 약속한 장소에서 모였고, 7월 5일엔 작전 세부 사항을 조율하였습니다. 7월 6일, 함대를 이끌고 노량에 도착했을 때 원균은 파손된 전선을 수리하여 대기 중이었고, 함께 항해해 진주 창신도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한산도 대첩(8승 1592.7.8)

7월 7일, 바람이 거세어 당포로 방향을 바꾸었고, 그곳 백성 중 피란 중이던 김천손이 급히 달려와 70여 척의 왜선이 견내량에 정박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7월 8일, 우리는 바로 적이 있다는 그곳으로 출동했습니다.

견내량은 바위섬이 흩어져 있고 좁아 전투에 부적합한 곳이었기에, 왜군을 유인하여 넓은 바다인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낸 뒤 포위해 전멸시키기로 했습니다.

판옥선 몇 척을 선두로 내세워 일부러 공격하는 척하며 적을 유인했고, 적들은 전열을 갖춘 채 추격해왔습니다. 우리는 일부러 퇴각하며 적을 넓은 바다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학익진을 펼치며 일제히 총통을 발사했습니다.

그 결과 적의 대형 전함 수 척을 바로 격침시켰고, 사기가 꺾인 적들은 도망치려 했습니다. 우리 군은 용맹히 돌진하여 화살과 화포를 퍼부었고, 거의 대부분의 적을 전멸시켰습니다.


권준, 어영담, 김환, 배흥립, 이순신(李純信), 이기남, 윤사공, 신호, 정운, 김인영, 황정록, 송응민, 최천보, 이응화, 박이량 등 각 장수들이 적의 전함을 격침시키거나 포획하여 수많은 왜병을 베었습니다.

무수한 적선이 바다 위에서 불타고 가라앉았으며, 적의 시체가 물에 빠져 죽은 수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적 400여 명은 해안가로 도망쳤고, 남은 전함 몇 척은 도망쳐 멀리 사라졌습니다.


안골포 해전(9승 1592.7.10)

7월 9일, 가덕도에서 안골포로 이동했고, 왜군의 전함이 약 40척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진을 쳤습니다. 좁고 얕은 안골포 지형을 이용해 왜군은 숨었고, 우리는 학익진으로 전열을 갖춰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총통과 화살을 비처럼 쏟아부었고, 이억기 우수사가 복병을 이끌고 합세하여 더욱 강력한 공격을 펼쳤습니다. 적의 대형 전함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적은 상륙하거나 도망쳤습니다.

이때 나는 백성들의 피해를 염려하여 함부로 추격하지 않고 군을 1리쯤 물려 야영하였습니다.


7월 11일

새벽에 다시 적을 포위하려 하였으나, 왜군은 이미 닻을 끊고 도망친 뒤였습니다. 전날 전투 장소에는 불에 탄 왜군의 뼈가 남아 있었고, 통영 땅 전체가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정찰병이 탐문한 결과, 적선은 김해와 양산 쪽으로 도망쳤고, 절에 있던 노승의 말에 따르면 100척 정도가 남아 있었으며, 며칠 동안 계속 출몰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이날 저녁 우리는 천성보에 머물며 적을 혼란시키기 위해 일부러 머무는 척하였고, 밤중에 군을 몰래 철수시켰습니다.


7월 12~13일

다시 한산도로 돌아왔을 때, 상륙했던 왜병들은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있었습니다. 주민들과 군사들이 일부 적을 처단했으며, 남은 400여 명은 새장 속 새처럼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병력과 식량이 부족했고, 금산 쪽 왜적이 전주까지 침입했다는 급보로 인해, 거제 군민에게 남은 정리를 맡기고 진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이번 전투로 베어낸 적의 머리는 총 90급이었으며, 그들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조정에 보냈습니다.

저는 미리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공 다툼(적의 수급 베기)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일부는 공을 다투다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전투보다 보고된 수(수급된 적의 머리)는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장계에 첨부한 각 장수의 공적은 전라도 우수사 이억기 측에서도 따로 보고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모든 내용을 깊이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실제 《견내량파왜병장》은 매우 길고도 세밀한 장계입니다.
이 글은 그 모든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지만,
놓쳐서는 안 될 핵심과 중요한 흐름들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치밀한 전략과 병사들을 향한 깊은 애정,
그리고 전쟁의 긴박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장계를 통해
그날의 바다 위, 조선 수군의 결연한 의지를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해상에서 전패한 일본군은

전라좌수영, 즉 이순신 장군의 본거지를 육지에서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육지에서의 결사항전 – 웅치·이치 전투

웅치 전투(음력 1592년 7월 7일)

전주를 향하던 일본군은
전라도로 들어가는 관문인 웅치 고개에서
김제군수 정담이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비록 고개는 안코쿠지가 이끄는 왜군에게 뚫리고 말았지만,
정담과 그의 병사들은 처절한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일본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웅치를 넘어 전주로 진군하던 왜군은
곧바로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군에 다시 막히게 됩니다.

황진은 전주 바로 앞, 안덕원에서
야영 중이던 왜군을 기습 공격하여
전주 공격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적은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치 전투(음력 1592년 7월 8일 또는 8월 중하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이

흙성 하나 없는 산등성이와 고갯길에서 결사항전한 조선군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는 권율, 황진 두 장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불리한 지형과 열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며 싸운 끝에 일본군을 물리친 기적 같은 방어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경명의 의병대가 금산으로 향한다는 첩보가 전해지자,
고바야카와는 퇴각을 결정하고 일본군은 물러났습니다.

이치 전투의 승리는, 조선군과 의병, 그리고 지켜내야 한다는 모두의 간절한 마음이
함께 만든 전라도 방어의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일본군의 시선을 끌어주며 시간을 벌어준 고경명의 의병대
1592년 금산전투에서 거의 전원 전사하는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

이기기 어려운 싸움임을 알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맞서 싸운 고경명의 의병대.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용기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역사입니다.





한편 경상도에서는

곽재우, 김면과 같은 의병장들이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혔습니다.

이로 인해 경상도를 통한 전라도 침공로도 차단되었고,

일본군은 남쪽으로 진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바다에서는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육지에서는 전라도 진출이 번번이 좌절되었으며,

후방에서는 곽재우와 김면 등의 의병들이 펼치는 끊임없는 게릴라전에 시달렸고,

병참선은 차단되어 보급품은 바닥나 일본군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명나라의 참전 소식까지 들려오자

일본군의 사기는 끝내 바닥을 치고 말았습니다.






참고문헌

황현필의 『이순신의 바다』

노승석이 옮긴 『교감완역 난중일기』

나무위키 웅치 이치전투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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