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죽어야 할 운명인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이 질문의 심화 격인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할 때면 숨 막히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직면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나와 함께 이 질문에 고민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선생님, 부모님과 같은 주변의 어른들은 이 질문을 외면한 체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런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꺼내면 나를 이상한 아이로 보거나, 불쾌해하거나 아니면 둘 다 일 것 같았다. 내 또래 친구들은 더더욱 죽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을 찾다 보면 죽음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이 질문을 회피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주체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그리고 내 죽음 이후에 '나'라는 존재가 없는 이 세상을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거침없이 흐르고 그 순간을 막을 방법은 없다. 영겁의 시간 뒤에 태양도 우리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모두가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게 된다. 우주의 시간 속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함께 존재하는 것뿐.
파도처럼 밀려오는 허무주의를 중학생 아이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고독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이 질문은 역설적으로 나의 인생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되었기에 허무주의 따위로 끝낼 수는 없었다. 유한한 내 인생을 더 가치 있게 살고 싶었고,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오직 나로부터 나와야 했다. 죽음을 외면한 체 살아가는 주변 어른들이 주입하는 가치는 신뢰할 수 없었다. 결국에는 나 홀로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수학 수업시간에 어떤 식을 적어보고는 스스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기쁜 나머지 내 짝꿍에게 설명해 줬으나 시큰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식은 아래와 같다.
해석하자면 이렇다. 인간의 삶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하루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까? 지금 해야 하는 것을 100년 뒤로 미루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미루어도 영원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오늘 하루 해야 하는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의 삶이 무한에 가까워진다면 우리 하루의 가치는 0에 가까워질 것이다.
반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우주의 시간 위에서 0에 수렴한다. 가정이었던 무한의 시간이 점점 0으로 가까워질수록 우리 하루의 가치는 다시 아래처럼 무한에 가까워진다.
그렇다. 유한함이 우리의 삶을 가치 없게 만들지는 못한다. 오히려 죽음으로 끝나는 유한함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오늘 하루의 시간을 멋있게, 새롭게 살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이는 분명 영원히 산다는 신이 부러워할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