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은 애초에 없었다.
21세기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결과론적 사고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다. 나도 그렇다. 우리 일상 속에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한다. 원인이 없으면 현상(결과)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원인의 탓은 자주 아니, 거의 ‘개인’ 탓으로 귀결된다. 개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세계는 한 사람, 그러니까 개인에게 원인을 돌리기 충분하다. 능력과 개인을 결부한 말들. 좋은 대학(직장)에 못 갔어? 그건 노력을 안 한 네 탓이지. “ 혹은 ”40살이 되어도 집이 없어? 그건 열심히 살지 않은 네 탓이지. “라는 말들 말이다. 뉴스에 나오는 많은 불행도 개인(그들)의 탓으로 돌리면 마음이 편하다.
현실에 치여사는 사람들이 어떤 현상(문제)에 대해 거시적인 사고를 통해 종합적인 원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모든 결과를 개인의 문제로 회귀시키면 이보다 간단하고 편한 것이 없다. 모든 결과의 원인이 ‘나‘가 돼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나 스스로를 착취하면 안 되는 가련한 운명을 맞이한다. [피로사회] 책을 보면 21세기 사회는 자기 착취라는 연료로 굴러간다고 한다. 내가 문제가 아님을 반증하기 위해, 능력주의라는 명목 하에 우리는 야근도 불사하고 새벽까지 일하고 공부한다. 여기에 긍정의 함정도 한 몫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말. 이 말을 들으면, 왠지 무엇이든 해낼 수 있고 해내야 할 것 같다. 사회는 풍족해져도 우리 마음과 정신은 여유를 잃고 점점 가난해진다.
실수와 실패를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완벽주의가 조장된다. 원래 실수와 실패,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문제의 원인이 ‘나’였음을 깨닫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좌절하고 수치를 느낀다. 이후에는 ‘더 이상의 실수(실패)는 없다.’라는 마음으로 완벽에 성을 다한다. 그리고 실수(실패)의 원인이 ‘쟤(타인)’였음을 인지하면, 포용력 있게 실수(실패)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소수다. 보통 욕하기 바쁘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도 든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고 타인이 하는 실수(실패)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실수하는 사람들, 능력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내 기준으로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났다.
직장생활 3년 만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완벽’은 허상이라는 거다. 세상에 ‘완벽’은 없다. 영업사원으로 입사를 한 내가 여태껏 저지른 실수는 수도 없다. 거래처 미팅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다 돌아온 적도 있고, 직함을 잘못 부른 적, 오류를 잘못 확인해서 안내한 적, 타사보다 몇 천만 원 더 비싸게 입찰제안을 한 적 등 셀 수가 없다. 이런 실수(실패) 속에서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내 성장은 망한 것들을 통해서 가히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또, 모든 사람에게 배울 점이 있었다. 능력이 없더라도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실수가 잦더라도 분위기 메이커인 사람도 있다. 여러 부서에서 많은 사람들과 일 했지만, 단점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옆에서 지켜보면 그 사람만의 특색과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모든 방면에서 완벽한 사람도 없었다.
‘진화’는 우리 삶과 비슷한 것 같다. 사람이라는 종의 진화가 애초에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모든 종은 완벽하게 효율성을 따져가며 진화하지 않았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 신체 일부를 없애고 만드는 형태로 진화했다. 진화는 서투른 임시방편에서 시작된다. 바닷속에 사는 포유류인 고래는 아직도 아가미가 없고 상어는 부레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구가 탄생한 순간부터 진행된 진화라는 거대한 흐름도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완벽’을 강요하는 바보들을 만나면, 나는 속으로 ‘완벽은 애초에 없었어. 이 멍텅구리 같은 놈아.’라고 읊조린다. 완벽해서 살아남은 것도 아니고 완벽하게 진화하지도 않았다.
나는‘ 위대한 개츠비’, ‘노인과 바다’, ,‘주홍글씨’를 좋아한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주인공들이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특히 ‘위대한 개츠비’는 책 제목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다. ‘뭐가 위대하지? 반어법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왜 ‘위대한’ 개츠비인지 알 것도 같다. 이 소설들 속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건, ‘사람은 본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좌절하고 흔들리면서도 삶을 살아간다.’이다. 이 책뿐만이 아니다. 명작으로 불려지며 몇 세기동안 읽히는 책들을 보면, 완벽은 없다. 완벽은 애초에 없는 거다.
완벽해지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거다. 모든 것이 항상 완벽한 삶을 상상해 보면, 진짜 재미없을 것 같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것에 더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은 우리 삶과 닮아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안 되는 발레 동작이 됐을 때 쾌감을 더 느끼고 애먹었던 거래가 성공했을 때 가슴 깊은 곳부터 벅차오른다.
어쩌면 우리 깊은 심연에는,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