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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imming Oct 03. 2024

(백수일지) 31살에 백수가 된 키라

2. 변명거리가 사라졌다.

d+2

어제 옷장정리를 하다, 옷들의 상태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올해 봄 혹은 작년 가을겨울에 입고 옷장에 아무렇게 넣어놨던 옷들. 트렌치코트의 목 부분과 셔츠에 얼룩이 져 있었다. “남이 보면 욕하겠네. 진짜”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무더운 여름, 반팔을 입은 사람의 회색 팔꿈치를 보고 난 후 나는 마음속 팔꿈치 감별사가 되었다. 여름에는 팔꿈치가 청결의 척도라면, 가을겨울에는 옷의 목이나 소매가 나만의 청결 감별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는 ’ 회사에 야근이 많아서, 회사가 바빠서, 혼자 자취를 해서’ 등의 변명으로 나 자신과 타협했다. 하지만 남아도는 게 시간인 백수인 나에게 ‘회사’는 더 이상 요긴하게 써먹지 못하는 변명이다.


혼자 빨래를 해볼까 생각하다, 왠지 옷을 더 망칠 거 같아 크린토피아에 맡기기로 했다. 홈플러스 앱에서 먹고 싶었던 것들을 시켰다. 자취생에게 귀한 과일, 고기류, 요거트류 담았다. 그러니 금세 7만 원이 넘었다. 이렇게나 물가가 올랐구나 새삼 느꼈다. 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켜고 경력서를 업데이트했다. 작년에도 이직을 준비했던 터라 2024년 들어서했던 업무성과만 적으면 됐다. 스트레스받아가며 하루하루 분노에 가득 차 살았는데 문서로 정리하니, 막상 3~4개로 정리할 수 있었다. 주 40시간 4주씩 총 9개월 1,440시간.


“생각보다 별게 없네. 회사를 나오니, 역시 다 별게 아니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여러 구직 사이트에 업데이트된 이력서를 올리면서, 날로 취업하고 싶다는 요행을 바란다.


여름에는 벌레가 쉽게 꼬여 자취방에서 음식을 거의 해 먹지 않았다. 백수인 나는 이제 시켜 먹거나 외식하려면 스스로에게 명분을 제시해야 한다. 친구를 만났다든가, 오늘 부모님 생일이라든가 혹은 면접준비를 해서 시간이 없다든가 말이다. 그런 명분 없이, 그냥 외식에 돈을 쓴다는 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제 자취방에서 햇반을 돌려 먹을 날들만 남은 것이다. 10월~12월까지는 취직준비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고자 계획했다. 그냥 어영부영 보내기에는 대가를 치르고 나왔기에, 하루 투두 리스트를 급조하기 시작했다.


10월 둘째 주까지는 자바 입문 강의와 운전연수에 집중하고, 10월 둘째 주부터 11월 둘째 주까지는 동영상 편집 수업과 비즈 목걸이 공예, 이후로는 만약을 위해 속눈썹 펌/연장 강의와 타로 강의를 듣기로 다이어리에 적어두었다. 계획한 것들을 하며, 취준 이력서는 오전에, 요가와 발레도 가야 하고, 책도 틈틈이 읽어야 한다. 그러다, ‘이게 맞나?’ 생각이 든다. 또 나는 나를 다른 식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걸까, 마치 ‘저 백수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에요. 강의도 듣고요, 글도 쓰고 학원도 다녔어요. 요가와 발레 하면서 자기 관리는 필수로 했죠.’ 이런 걸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거 같다. ’ 이러다가 나 다시 아파 죽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틀 라이프‘를 한 시간 정도 읽다가, 침대에 다시 골인. ’ 선생님이 오래 앉아 있는 거 안 좋다고 했어. 누워서 쉬는 게 최고라고 하셨지.‘라고 내 게으름에 약간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선잠이 들듯, 말듯한 상태에서 초인종이 눌렸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초인종이 눌린다는 건, 온몸 세포에게 “공습, 대기상태 발령”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인터폰 쪽으로 다가가려 최대한 조용히 몸을 일으키다, 핸드폰에 알림톡을 본다. ‘홈플러스 배달 완료’ 그제야, 내가 공휴일 아침 7시에 시킨 홈플러스가 배달 왔음을 안다. 배달 기사가 간 것을 확인 후, 문을 열어 이번 달 사치품을 정리한다.


’ 사치품‘에는 당당 치킨도 포함되어 있다. 옛날 방식으로 튀긴 옛 시장치킨 2마리를 9,900원에 샀다. 호기롭게 덤벼든 거 치고는, 한 마리도 먹지 못했다. 살코기를 발라 밀폐용품에 담고 ’ 제발 다 먹을 때까지 상하질 않길‘염원하면 냉장고에 넣어둔다. 아마 저 치킨의 절반은 상해 음식물 쓰레기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이건 수많은 데이터 축적을 통한 객관적(?) 예감이다. 1인 가구가 2~3인분을 질리지 않고 연달아 이틀 이상 먹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맛있는 음식도 2번 먹으면 질리는데, 2~3인분은 적어도 3끼 이상 먹어야 한다. 1인 자취생의 비극이다.


너무 집에만 있었나, 살짝 어지럽고 배불러서 밖에 나갈 심산으로 짐을 싼다. 태블릿과 거치대, 키보드, 핸드폰, 노이즈캔슬링 이어폰. 조금 걸으니, 울적했던 기분도 나아진다. 31년 살면서 배운 건, 1. 우울하면 10분 이상 무작정 걷자 같은 삶의 노하우들이다. 한 정거장 떨어진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7~8시쯤 집에 걸어 돌아가, 오늘은 롤드컵을 늦게까지 보고 자야지 생각한다. 그게 변명이 사라진 백수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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