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죽어 있는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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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장담한 것과 같이, 롤드컵을 보다 새벽 1시쯤 잠에 들었다. 아침 6시 20분에 울리는 휴대폰 알림음을 가볍게 끄고 다시 잤다. 눈을 뜨니, 9시를 넘긴 시간. 퇴사 3일 만에 9시 넘어 일어나 본다. 갑자기 약간의 찝찝함이 밀려온다. 이내, 백수의 특권이라 생각해 버리기로 결정한다.
게슴츠레 눈을 떠, 침대 위 휴대폰부터 더듬더듬 찾는다. 아침부터, 반가운 이의 연락이 와 있다. 친구가 전하는 더 기쁜 소식. "언니, 소개팅할래?" 그리고 나열된 소개팅남의 신상. '185센티의 데이터분석가?!? 무조건 받아야지.' 빠르게 답장을 보낸다. "할래. 나 백수 돼서 뭐라고 하지." 친구와 함께 고민하다, 그냥 백수인 건 말하지 않기로 한다. 퇴사한 지 3일밖에 안된 갓 된 백수니, 직장인과 다름없다고 타협한다. 소개팅은 기대하지 않아야 성공확률이 높다고 하지만, 기대가 되는 걸 어떡한 담. 친구들의 열렬한 도움으로 올해 버킷 리스트 1개는 달성했다. 소개팅 3번 이상 하기.
식빵과 요구르트, 샤인머스켓을 아침으로 준비하고 태블릿에 어제자 뉴스를 틀어 놓고 밥을 먹는다. 그리고 나갈 준비를 한다. 때 묻은 재킷과 신발을 크린토피아에 맡길 심산으로 주섬주섬 챙긴다.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에 겉옷을 챙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혀 옷장 앞에 서성이다, 니트를 하나 더 챙긴다. 크린토피아 사장님께 이것저것 말하고 나서 결제하니 21,400원이 나왔다. '비싸다. 내가 퇴사하니까 다 비싼 거 같네.' '천동설'도 아니고 온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셀프설'을 방금 창조해 냈다.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양천구 청년 일자리 카페에 향한다.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청년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해 준다는 기관은 생각보다 깔끔하고 조용했다. 나를 포함해서 공간 사용 중인 사람은 3명. 기관 담당 선생님은 친절히 공간 이곳저곳과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설명해 주셨다. 적절한 조용함이다. 선선한 날씨 평일날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앉아 있으니, 대학교 시절도 생각나고, 고시생으로 공부했던 날들도, 취준생 시절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때는 그 시간들이 죽어있는 시간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취업을 했고 약 3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을 겪으며, 회사에 있는 시간들이 죽었다고 느꼈다. 지겨운 사람들과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업무들. 또, 상황이 바뀌니 그때가 죽어있는 시간이었는지, 지금이 죽은 시간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치 '호접지몽'같다.
자소서 항목을 적다, ‘참 별 걸 다 묻네, 이러다 내 전기까지 쓰라 하겠네.’라는 뒤틀린 생각을 한다. 3시쯤 되자, 사람들이 찼다. 10명 내외. 너무 배가 고파서 집에 가봐야겠다. 집에 와 어제 남은 치킨으로 치킨볶음밥을 해 먹었다. 배가 부르니, 힘이 난다. 몸을 부산스레 움직여 설거지를 한 후 빨래를 한다. 50분 빨래 코스로 맞춰둔다. 회사 다닐 때는 사치였던 코스. 나는 ‘스피드’ 코스를 애용했는데 17분이면 빨래가 다 돼서 속옷, 겉옷, 수건 여기에 흰옷까지 하면 한 시간 내외로 충분했다. 시간의 사치를 부려 오늘은 속옷, 겉옷, 수건, 흰옷을 죄다 50분 코스로 돌린다.
50분 빨래 코스를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지금이 죽어있는 시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