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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묘염 Nov 01. 2022

마음도 공문으로 다스립니까

보여주기 식 행정이 보여줄 수 있는 것.

아침에 출근을 하자마자 검은색 근조 리본을 받았다.  근조 글씨가 보이지 않게 뒤집에서 달고 있으라고 했다.  사람들이 물었다. 

"근데 왜 뒤집어서 하는 거래?" 

"몰라 그냥 그렇게 하랬대"

"누가?"

"그냥 위에서" 

위. 

위에서 내려오는 것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내려오는 과정에서 뭔가가 빠져버렸는지, 원래부터 뭔가 빠진 것이 그대로 내려온 것인지. 텅 비어있고 공허하다. 

위와 아래의 심리적 거리는 이태원과 내 거주지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멀어서 돕고 싶은 마음도 안타까운 말들도 도달하지 못하고 공허하게 흩어져버린다.  

경솔할 정도로 빠른 속도의 공문 한 장, 왼쪽 가슴에 보란 듯이 나부끼는 부끄러움 한 조각. 이런 것이야말로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들을 기만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무엇을 내보이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강제하겠다는 걸까? 세월호 때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노란 리본을 달았었다. 그리고 위에서는 그 노란 리본이 정치적인 것이고 공무원들은 정치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삼가라고 했다.  어떤 애도는 정치가 되고 어떤 애도는 강제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검은 리본은 지난 10년간 내려온 그 어떤 공문보다 정치적인 것만 같다. 


사건을 처음 접했던 아침 뉴스에서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cpr을 하는 모습, 대충 모자이크 처리된 사람들의 허연 팔다리가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줬다.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사고 현장에서 찍은 시민들의 영상을 , 밀고 밀리고 쓰러지고 , 길거리에 널브러진 사람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보냈다. 아주 어릴 때 봤던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때와 세상이 많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우리가 어떤 사건을 소비하고 사건의 핵심이 되는 인간의 존재를 다루는 방식이 더 나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생명의 존엄함과 허무함  사이에서 우리는 언제나 무력감을 느끼지만 최근에는 그 무력감 속에 자꾸 부끄러움이 스며 들어온다.   


사건이 있고 맞은 첫 월요일,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대부분은 애도와 안타까움의 마음에서 시작했겠지만, 그 안타까움이 과해져서 발언이 자꾸 수위를 넘나 든다. 거길 왜 가냐. 사람이 그렇게 많으면 조심했어야지. 그렇게 말하면 생이 조금 더 통제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게 느껴는 걸까? 생의 예측 불가능성이 주는 불안감을 그런 식으로 해소하는 걸까? 피해자 탓을 하기는 쉽다. 모든 것을 피해자의 부주의와 판단력 탓으로 돌리면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우월감과 , 그러므로 나는 그런 불행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인생이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것으로 느껴지니까. 하지만 생은 우연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그저 운이다. 

보상금을 논하자마자 피해자들의 자격이 거론된다. 보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재난의 책임 소재와 국가의 의무와 의무 불이행에 대한 논의가 피해자들의 자격 유무로 주의 전환이 되면서 사고 책임은 또 피해자 개인의 잘잘못으로 돌아간다. 무엇이 정치적이고 무엇이 정치적이 아닌가. 왜 우리는 아직 장례도 치르지 않은 젊은이들의 시신 앞에서 보상금을 논하고, 세금을 논하는가. 그 누구도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깟 돈과 아이를 바꾸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말은 본인의 모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본인의 영혼, 깊이 , 그 사람의 살아온 시간.  

제발 말을 아꼈으면 좋겠다. 


애도의 시간이다. 강요된 검은 리본의 시간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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