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되니 프라하의 길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프라하의 봄을 불러온 바츨라프 광장으로 향하는 아침이다. 우리 모녀 외에도 삼삼오오 걷는 일행들이 모두 한국 처자들이라선지 묘한 동지애를 느끼며 걷는 아침 산책길이 특별하다.
내 대신 연인들의 도시, 프라하에서 비엔나커피를 마셔달란 친구의 부탁을 들어줄 요량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바츨라프 광장을 찬찬히 둘러보았으나 스타벅스, 버거킹, 맥도널드 등 체인점으로 함락된 광장에서 비엔나커피를 찾을 수가 없다. 책방 옆 paul이란 로컬 카페살롱에서 비엔나커피 대신 에스프레소 한 잔! 갓 구워낸 황홀한 크루아상에 곁들인 커피가 제대로 유혹하니 쌀쌀한 길 위에 얼은 마음까지 녹는다. 에스프레소 한 잔 더!
엄마! 엄마가 마시는 커피, 나도 마시고 싶어.
커피는 어른만 마실 수 있는 건데 하늘이도 살짝 어른의 맛을 볼래?
으~악~ 너무 써! 봄에 수수꽃다리 연두이파리 씹는 맛이야.
그 쓴 맛이 사랑의 맛이란다. 사랑의 쓴 맛을 맛본 사람만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거야.
어린아이였던 하늘인 이미 어려운 커피를 정복하고 엄마와 함께 커피를 음미하는 사이가 됐다. 멀리 떠나온 체코 프라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함께 발품 팔며 나눠마시는 사이, 어른이 된 거다.
화약탑과 시민회관은 이름표를 보지 않고서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정말 까만 재를 뒤집어쓴듯 새까만 화약탑과 요정의 도움으로 변신한 신데렐라처럼 예쁜 시민회관이다. 미녀와 야수가 나란히 서 있으니 장점과 단점이 더욱 도드라진 모양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하는 시민회관 입장이 우리 앞에서 끊겼다. 백 살도 넘은 여자가 좀처럼 속을 보이기 싫다고 앙탈이니 빨리 포기하고, 전망대 입장료 2인 200 코루나(2018년 기준)를 지불하고 화약탑을 오른다. 좁고 가파른 계단 끝 전망대에선 누구나 눈동자가 커지고 감탄사가 쏟아진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 닿는 곳마다빨강치마 입은 집시여인들이 플라멩코를 추는 듯 강렬하게 아름답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고 저마다 소리치는 듯 파란 하늘 아래 붉은 지붕들이 펼쳐져있다. 전망대는 좁고 사람들은 많아서 어깨가 부딪치기 마련인데 누구 하나 얼굴 붉히지 않는다. 이미 빨강이 넘쳐나서 얼굴 붉힐 필요가 없는 거겠지.
체코엔 천 개의 탑이 있다더니 사방이 탑이다. 저 탑은 뭐지? 싶어 열심히 가봤더니 레스토랑이었다.
열한 시 정각이 되면서부터 구시청 청사 시계탑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프라하의 핫한 볼거리 시계탑은 육백 살 훌쩍 넘었으나 청년 같은 모습이다. 프라하에선 백 살 쯤은 나이로 안 치니 내 나이도 청춘이 된다. 그렇다면 캐리어에 넣어놨던 발랄을 잠시 꺼내볼까? 유명하단 굴뚝빵을 오물거리며 발랄하게 쏘다니는 아침 산책의 정점은 시계탑 정면돌파였으나 내 발랄한 발걸음은 금세 막혀 삐딱한 측면에서 겨우 바라봐야만 했다. 파도처럼 몰려드는 사람무리에 갇힌 시계탑의 유명세를 직관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수수꽃다리 연두이파리 같은 사랑의 쓴맛을 기억해 내며 카페 폴에서 내가 마신 건 쓰디쓴 에스프레소 두 잔이 아니라 프라하 높은 하늘에 뿌려진 찬란한 감탄사, 부러운 탄식이 아니었을까. 무채색 옷을 입고 시계탑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시나브로 시간의 향기와 색깔에 물드는 현장을 볼 수 있었던 것 또한 기막힌 축복이었을 거야. 육백 년 넘는 세월, 지치지 않는 초침의 걸음을 마지막까지 기억하라는 귓속말도 잊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