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곱 시에 떠나 밤 일곱 시에 닿은 제주는 온통 깜깜했어요. 그런데 까만색 밤이 조용하다는 하준이 말소리에 제주의 밤은 슬그머니 깨어나고 있네요. 집 앞바다에 별들이 빼꼼히 내려앉아 반짝반짝 쳐다보고, 나뭇가지마다 지나가는 바람들이 수군거려요.
여긴 제주 성산의 신산리예요. 그리운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기고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기니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는 시인의 꼬드김(그리운 성산포/이생진)에 홀랑 넘어간 할미가 또 마악 퇴직한 할아버지를 꼬드기고, 할미와 할아버지와 함께라면 나도 꼭 가야 한다는 하준이가 따라붙어 떠나온 참이에요.
하준이는 할미의 절친이에요. 한동안 구름도 무심히 흐르고, 꽃들도 그저 묵묵히 피어나는 줄로만 알았어요. 왜 사는 줄도 모르고 그저 살아내고 있었거든요. 경이로움을 이끌고 나타난 하준이로 인해 세상사는 일이 신명 난 핑크 같은 그림이란 걸 알아챘잖아요. 그래서 하준이와 할미는 짝꿍일 수밖에 없어요.
제주 신산리숙소/아트레이지
할미와 하준이가 함께 떠난 제주 성산의 조용한 마을 신산리에서 하준이는 일곱 살 인생 첫 그림일기를 그립니다. 하준이가 어떻게 그릴까, 옆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이 네 개임에도 하준이는 거침없이 쫙쫙~그립니다. 배 밑바닥에 묶어 놓은 모하비도 그려놨고, 날아다니는 갈매기랑 매운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는 하준이까지. 아이는 어른의 생각보다 훨씬 유연하다는 걸 하준이 덕에 또 깨닫네요.
성산에서 삼십일 동안 할미가 지켜야 할 것은 최대한 저지와 충고와 조언을 하지 말자. 맞춤법과 띄어쓰기 틀린 것, 지적하지 말자! 꼭 하나 지켜야 할 건 빼먹지 말고 그림일기 쓰기! 하준이는 잘 지켰고, 제주를 떠날 즈음 제법 단어충전이 됐으며 사람 그리기에도 힘이 빠져서 얼추 사람 모습을 흉내 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