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방송은 FM93.9만 듣는다. 그것도 라디오가 아닌 앱을 깔고 듣거나 지나간 방송은 유튜브를 이용한다. 어느덧 밖은 검은 물감을 칠한 듯 시커멓기만 하다. 간간히 아파트의 불빛이 비칠 때면 어둔 밤바다를 밝히는 오징어잡이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홀로 앉아 지나간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여지없이 DJ의 멘트가 흘러 나온다. ‘나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DJ의 말이 끝나자 느린 템포가 있는 노래가 흐른다. 그 노래를 따라 내 마음도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노트북 옆에 놓인 커피는 천천히 식어가고, 커피향이 밴 DJ의 나즈막한 음성이 거실을 유영하기 시작한다. 식물들을 향해 켜둔 선풍기가 산뜻한 소음을 남기고 쉴새없이 돌아간다.
내 영혼이 여기로, 저기로 하염없이 더듬거리며 지나가는 동안 귀에 익은 음악이 나온다.
왈츠를 추는 듯한 경쾌한 음이 내 손을 맞잡는다. 슬로, 슬로, 퀵, 퀵, 중학시절 짝꿍과 손을 맞잡고 활보했던 무용실이 오버랩된다. 춤을 좋아하진 않지만 발레슈즈를 신고 무용실에서 춤을 출 때면 나비가 된 것 같았다. 비록 나비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무엇이 되려고 아직도 고치안에서 이리도 조용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걸까?
식어가는 커피를 마시며 음악 속에 머무른다. 오늘따라 귀에 익은 곡들이 서로 반갑다며 터치를 하면서 이어진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고요히 즐길 수 있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엄마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뭐하니?” 하고 들여다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도 나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이제는 햇살이 한층 더 따사로워졌다. 뺨을 스치는 바람 속에 봄의 보드라운 손길이 숨어있는지 자꾸만 그 손길이 좋았다. 산책을 하며 봄을 반기듯 울어대는 새들의 경쾌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한 바퀴, 두 바퀴 공원을 돌면서 나무를 살피고 새를 살핀다. “곤줄박이네!” 검정색이 박혀 있다는 의미의 곤줄박이가 반가워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야속하게 줄행랑 친다.
선풍기 바람에 초록빛 식물들이 흔들린다. 보사풍의 경쾌한 음악에 내 마음이 흔들린다. 문득 누구의 시인지는 모르지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란 구절이 떠오른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청춘을 보내고 다다른 지금이지만 여전히 나는 흔들리고 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거실에서 식물과 나, 음악이 함께 흔들린다. 식물은 선풍기에, 나는 음악에 그렇게 흔들리는 밤이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보내고 고요한 공간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 시간, 나에게 나즈막히 말해본다.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순간 나의 하루를 축복하듯 감미로운 보사바로크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