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리의 역사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3
서현과의 통화를 종료하고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편의점 앞 파라솔의자에 앉아 한주대학병원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산부인과 김영한 교수의 이름을 검색하고 검진날짜를 확인한다. 이번 달은 이미 꽉 차있고, 해를 넘겨 1월 중순쯤으로 겨우 진료일을 잡을 수 있었다. 예약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삐져나온다. 파라솔의자에 등을 대고 목을 꺾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짙은 먹구름이 겨울 하늘을 뒤덮었다. 곧 비라도 쏟아질 거 같아 서둘러 일어나 좁은 사거리를 가로질러 큰길로 나왔다. 낮은 상점들이 즐비한 대로변을 따라 이촌역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처음에는 숨이 찰 만큼 빠른 속도로 뛰다시피 걷다가 이내 걸음을 늦췄다. 불현듯, 짧고 굵게 마음을 졸인 나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고달픈 자영업자에게 유일한 기쁨은 그나마 자유롭다는 거 아니겠는가. 매번 찾는 손님이 있다면 말은 달라지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게 아니니까.
"고생했어! 오늘은 가게 문 닫고, 스타벅스!"
쿠폰을 선물 받거나, 친구를 만날 때 빼고는 선뜻 들어가지 않던 별이 반짝이는 커피숍. 오늘은 홀몸이지만 당당하게 들어가 오천 원이 넘는 커피를 고민도 없이 주문했다. 점원이 건넨 번호표를 손에 쥐고 한적한 자리를 찾아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리번거린다. 아침의 선명한 햇살이 내려앉은 소파와 낮은 테이블 발견! 잽싸게 걸어가 명당자리에 영역표시 비슷한 걸 해놓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폭신한 쿠션에 엉덩이와 등짝을 밀착시키자, 옅은 탄성이 새어 나온다.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보다 통통한 체격이었던 나는 물렁살인 줄 알았던 가슴이 딱딱하게 몽우리가 질 즈음에 첫 생리가 시작되었다. 저녁 내내 아랫배가 살살 아프더니 새벽녘 하복부가 이상하리만큼 축축했다. 소변실수와는 또 다른 찐득하고 꿉꿉한 느낌에 화들짝 놀라 이불을 들춰보니 사방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시뻘건 충격은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지독한 불쾌감으로 남아있다. 엄마가 사준 사춘기 자녀를 위한 동화책 덕분에 생리가 무엇인지는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열 살 나이에 월경은 맨몸으로 미지의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암담함, 낯설고도 두려운 수치심이었다.
어쨌든, 열 살의 나는 그 새벽에 수건을 곱게 접어 속옷 위에 올리고 천연 생리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장롱 깊이 숨겨놓은 피로 물든 수건들을 부모님에게 들키기 전까지 비밀에 부쳤다. 엄마에게 왜 말하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불을 물들인 징그러운 피를 보고 질색한 나처럼, 엄마아빠도 그럴까 봐? 아니면 하루아침에 낯설어져 버린 나처럼, 부모님과도 멀어져 버릴까 봐? 어른에 것을 하는 열 살의 딸을 보며 슬퍼할 엄마아빠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 여하튼 몰래한 첫 생리는 비밀스러웠고 충격적이었으며 서글픈 경험이었다.
피에 젖은 수건을 들킨 그날 저녁, 생일도 아닌데 아빠가 생크림 케이크를 사 왔고. 책상 위에는 분홍색 위생팬티와 생리대가 놓여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생리는 부끄럼과 소박한 축하 속에서 무사히 넘어갔는데. 문제는 두 번째 생리 날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온 방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살려달라고 열 살의 나는 울부짖었다. 아빠는 오밤중에 약국으로 뛰어갔고, 엄마는 배를 움켜쥐며 이를 아득아득 가는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늘이 벌을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자유로운 유년시절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나버렸다. 생리를 하지 않는 날에는 다가올 그날이 두려워 달력과 진통제에 집착을 했고. 다가온 그날에는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양호실에 종일 누워있거나, 등교를 거부하거나. 셋 중 하나였다. 삼십 년 넘게 부모님과 나는 한 달의 한번 초상을 치르고 있다.
“현조야! 결혼하면 생리통도 사라진 덴다!”
나의 엄마 허윤정 여사님께서 스무 살 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해온 대사이다. 서른 후반이 넘어가면서 뚝 그쳤지만 말이다. 왜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52번 돌체라테 나왔습니다."
무릎 위에 올려둔 가방을 소파 옆에다 던져두고 카페 데스크로 걸어가면서 자문했다.
'너는 열 살 때부터 몸에서 자궁을 도려내고 싶었고. 일어나면 남자로 변해있기를 밤마다 기도했고. 진통제가 가방과 서랍과 눈에 보이는 곳마다 없으면 극심한 불안함에 시달리잖아? 그렇다면 그 의사 말대로 자궁이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순간 좀 전에 병원에서 난리를 치고 나온 게 미안해지기 시작한다. 뜨거운 잔을 입술에 대며 호로록 들이키자, 혀에 달린 맛봉오리가 달달하고 고소한 음료를 기쁨으로 맞이해 준다. 머그컵을 쟁반 위에 내려두고 인터넷을 검색한다.
[자궁근종은 여성에서 매우 흔하게 발생하는 질병이며, 35세 이상의 여성의 40~50%에서 나타난다. 생리량 과다가 가장 흔한 증상이며, 골반 통증, 생리통, 골반 압박감, 빈뇨 등이 나타날 수도 있다. 수술 치료는 자궁 자체를 들어내야 하는 자궁적출술과 복부에 구멍을 내는 복강경수술, 로봇수술 등이 대표적이고. 이러한 방법들은 병변을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지만, 복부 절개, 전신 마취 등 외과적인 치료에 수반되는 부담과 일상으로의 회복이 더디다. 하이푸 시술은 개복이나 절개 과정 없이 간편한 치료가 가능하고 초음파 에너지를 선택적으로 투과해 자궁 주변 조직의 손상 없이도 안전한 치료가 가능한 방법이지만, 가격이 비싸다. 보험 적용이 어려울 수 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자궁근종! 수술 필요 없다! 극심한 생리통 굿바이!]
그때, 희망적인 글자로 나열된 포스트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허리를 곧추세워 휴대폰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24세 김 아무개 씨, 고등학교 때부터 생리통 때문에 지옥 속에 살았어요. 하지만 미라클 한의원을 만나고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죠.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미라클 한의원에서 한방자연치료를 받고 3개월 뒤, 자궁에 있는 모든 혹들이 사라지고. 생리 때마다 저를 괴롭히던 통증은 싸악 사라졌어요!]
부라 부라 부라. 다 아는 내용이다. 또 해본 경험이다. 그러나 기적은 없었다. 한약을 먹는 동안은 통증이 아예 없지는 않았어도 불구덩이에 하반신이 빠지는 그런 고통은 아니었기에, 좀 효과가 있나 싶었지만. 한약을 중단하자마자 지옥의 문은 다시 열렸다. 수지침부터 쑥뜸 좌욕. 안 해 본 것이 없다. 동굴에 갇힌 곰처럼 쑥 진액과 생강 물을 몇 년을 마셔봤고. 동네 아줌마들이 "생리통에는 이게 좋데, 현조 엄마" 하는 것마다 부모님이 줄을 지어 사들였지만. 제일 특효약은 액상 진통제뿐이었다.
지금까지 생리 시작하기 이틀 전부터 끝날 때까지 진통제 한판은 먹어왔다. 약의 용량은 진통과 함께 점점 늘어났고 서른 살에 동전만 한 근종이 생겨났다. 그러나 산부인과에서는 3센티짜리 혹은 수술할 크기도 아니고 월경통은 딱히 방법이 없다고 했다. 진통제를 처방해 주며 큰일이 아니란 듯, 다음 환자 받아야 하니 빨리 나가라는 귀찮은 기색을 보일 뿐이었다.
기분도 마음도 영혼도 상해서 나오는 곳이 산부인과였다. 그래서 한동안 발길을 뚝 끊고 살다가 월경이 끝나도 통증이 멈추지를 않아 근 3년 만에 병원을 찾은 터였다. 그런데, 손 쓸 수도 없이 커다란 혹이 자궁 안에 꽉 차있고, 혹이 아닌 자궁을 떼어내라니. 비록 생리 때마다 "이 미친 생리 년!"이라며 아랫배에다 쌍욕을 날렸고. 오래도록 원망했고 밥 먹듯 저주하던 자궁이지만. 너무도 쉽게 떼버리라 하니까. 분노에 가까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진저리나는 자궁이라도 천대할 자격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 삼십 년을 넘게 괴롭게 했지만, 타인이 버리라 마라 할 수는 없는 거다.
"자순아 우리 끝까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급기야 자궁에 이름까지 만들어 붙이고는 차창 밖을 내다본다. 시험기간인지 일찍 하교하는 교복 입은 앳된 소녀들이 자유롭게 삼삼오오 까르륵 웃으며 스쳐간다.
"부디 아프지 말아라"
인류애 없는 이기적 문현조. 오늘따라 마음이 뭉클한 게 이상하다. 그냥 순간적인 감정이지만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저 맑은 얼굴들은 모른 채로 살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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