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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휘 Mar 29. 2024

조르바 같은 사람

자유와 모험 : 그리스인 조르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벌써 3번째 읽는 책이다.

2012년에 처음 만나 10년이 지나도록 자꾸 생각나는 그 이름 조르바는 내가 눈 감고 귀를 닫아도 언제든 어디서든 갑자기 툭툭 나를 건드리곤 했다.

예를 들면 여행 관련 책을 읽는데 거기서도 조르바가 나오고 sns에서 인친들의 피드에서도 너무도 자주 보이고.

그래서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조르바다.

오래전에 읽은 책은 대충 그야말로 대애충 어떤 스토리의 책인지정도만 기억날 뿐, 당시에는 심장에 박힌 문장도 한 마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책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자꾸 뭔가 아쉬움을 질질 흘려 곧 다시 꺼내보곤 하는데 <그리스인 조르바>도 마찬가지. 2 회독은 10년 후인 2022년에 했고, 다시 2년 만에 3 회독을 하는데 언제나 재독을 할 때 드는 생각은

어쩜 이렇게도 처음 보는 것 같지?이다.

조르바를 읽다 보니 나도 조르바가 되어갔던가.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듯 대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카잔차키스의 인복- 조르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조르바의 삶에 대한 정신을 배우고 깨우친다.

하지만 나는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라는 인복에 대해 말하고 싶다.

대체로 나처럼 인복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카찬차키스의 조르바는 너무도 부러운 인맥이다.

그를 그리스의 대문호로 만들어주는 데에도 영향이 컸으며 삶에 대한 진리를 제대로 깨우쳐주는 어른이 있었던 셈이니까.

나도 2,30대에 조르바 같은 어른을 만났다면 조금 더 빨리 성장하지 않았을까, 방황하는 시기를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이 작품은 카잔차키스가 실존하는 '기오르고스 조르바'를 만나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 살면서 삶의 의식을 바꿔줄 단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지 않은가.

요즘처럼 개인주의가 극대화되는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진짜 멘토가 되어주는 것은 웬만한 이타성을 가지지 않고서야 불가하다. 내 삶만 중요할 뿐 타인의 삶은 그냥 불구경과 다를 바 없으니까.


작중에서 화자인 '나'가 조르바를 처음 만났을 때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냉소적이면서도 불길같이 섬뜩한 그의 강렬한 시선이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라는 인상을 받았다.


조르바는 '나'를 만났을 때 자기를 광산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리곤 당당하게 말했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니 무슨 뜻인가 싶어 내가 묻자 조르바는 말한다.

"자유라는 거지!"


조르바에게 있어 자유는 삶, 그 자체였다.

즐거워도 슬퍼도 춤을 춘다.

언어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해서 춤으로 표현하고, 신이 나서 죽을 지경이면 산투르를 연주했다.

다만 그 누구도 시켜선 안된다. 오직 조르바의 마음이 내킬 때에만, 오직 자유의지로만 연주한다는 자기만의 철학이 있다.


화자이자 저자인 카잔차키스는 소위 말하는 펜대 잡는 젊은 지식인이었다.

반면 조르바는 60대의 늙은 노동자였다.

이 둘은 누가 봐도 섞이지 않을 것처럼 나이도, 사회적 위치도 다르다. 피레에프스 항구가 아니었다면 생전 만날 기회조차 생기지 않을만큼의 거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조르바는 야생적이고 거침없는 자유분방함을 가졌다. 반면 '나'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조용했고, 평탄했고, 이벤트나 해프닝이 별로 없는 삶을 살았다.

"내가 보기에 두목은 배고파 본 적도 없고, 죽여 본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알 수 있겠어요? 당신 머리는 순진하고 살갗은 햇빛에 타보지 않았어요"

조르바는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했고, '나'는 내 섬약한 손과 창백한 얼굴, 피투성이가 되어 진창을 굴러 보지 못한 내 인생이 부끄러웠다.


조르바가 가르쳐 준 자유

조르바는 처음부터 '나'에게 함께 일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고 했다.

자유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란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어떤 시공간이 주는 여유로움? 이런 것이지 않을까?

조르바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필요하다만 손가락도 잘라낼 수 있는 원초적인 것, 그리고 성체화되는 '메토이소노'에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동물농장에서 조지 오웰은 자유란 " 우리 스스로를 지배하는 것"이라 했다.

단순하게 제약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지배하며 자기 결정권을 갖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리라.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자유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는 타인의 노력 또한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고대 철학자들부터 대문호들까지 말하는 자유란 조르바의 자유와 다르지 않다.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닷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지금 한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나'는 조르바를 통해 비로소 자유로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광산 사업을 실패로 마무리했을 때 '나'는 조르바와 함께 자유의 춤을 추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자유를 느꼈다니.

우린 사업이 망하거나 관계가 끝이 났을 때 춤을 출 수 있는가?


조르바가 말하는 자유란 직접 몸으로 부딪혀 경험하고, 좌절하지 않고 지금의 순간에 살아있음을 감사하며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유로운 삶을 사는 정신이다.

기꺼이 내가 원해서 그 모든 것들을 행하고 수용하는 것이 자유의 자세가 아닐까.

여덟 단어의 박웅현 작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3가지를 깨닫는다고 했다.

카르페 디엠 -현재에 충실하라

메멘토모리 - 당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아모르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이 정신을, 삶에 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몸소 보여준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최고의 인복이었다.

그를 만나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되었고, 도전하고 부딪히는 정신을 배웠으며,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면서도 즐겁고 감사한 마음을 얻었다.

이보다 더 최고의 인생 멘토가 있을까.


나에게는 직접적인 조르바는 없었지만, 자신의 멘토를 나누어 준 카잔차키스가 있다.

그로 인해 나에게도 이젠 인생최고의 멘토가 생긴 셈이다.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일.

잘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 발씩 내디뎌보리라.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공감할 수 있게 되는 날, 나도 비로소 자유로워지리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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