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향에 머무는 마음

처음 머물러본 커피 향

by 그레이스웬디

커피를 좋아하지만 하루에 딱 한 번만 마신다.

이것이 커피를 좋아해서 마시는 건지, 그냥 습관처럼 마시는 건지 모를 때가 더 많다.


매일 아침 남편이 커피를 사다 주면 마시면서 곧장 일을 하는데, 글을 쓰는 일을 하다 보니 커피가 커피인지 물인지 그저 마시는 행위만으로도 징크스를 없애는 것처럼 늘 책상에 앉을 땐 커피가 놓여있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도, 마시는 커피는 커피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보다 역시 무언가를 마시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커피가 아니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글을 쓸 땐 글에, 책을 읽을 땐 책에 집중할 뿐 커피에 집중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왜 커피일까.

사실 맛도 맛이지만 나는 그 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커피 향은 맛보다 훨씬 더 좋은 기분을 선사한다. 맛은 언제나 그 향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인 듯 커피 향이 주는 그 느낌은 나를 아주 포근한 감정에 휩싸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차가운 커피보다 뜨거운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는 음료수 마시듯 빨대로 쭉쭉 빨아 커다란 컵의 절반이상을 한 번에 들이켜는 것보다 잔을 입으로 가져올 때 피어나는 따뜻한 증기와 그것들이 뿜어내는 향이 코를 감싸면서 후후 불어 한 모금씩 천천히 목구멍으로 흘려보내야 맛을 느끼는 것이니까. 와인처럼 코로 먼저 마셔야하는 것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더없이 따뜻한 커피가 어울리는데 그것은 커피를 좋아하거나, 커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 잘 알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보고 지나쳤던 이미지들, 그 감성적인 이미지들이 무의식적으로 내 안에 각인되어 왠지, 또는 어쩐지 비가 오늘날에는 커피가 더욱 잘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왠지 운치 있어 보이고, 어쩐지 감성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것에서는 커피 향을 느낄 수 없지만, 커피를 매일 마시는 사람이라면 무뚝뚝한 이미지에서도 그 향이 나는 듯 느낄 수도 있으리라. 마치 3D영화처럼 생생하게.


매일 커피맛도 모르고, 커피 향도 늘 맡는 밥냄새처럼 무심하게 지나치다가 오늘은 비도 오겠다, 느릿느릿하게 일을 하기로 작정을 하고 커피 향에 오래 머물러보았다.

솔솔 피어나는 김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인센스 스틱을 켜놓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잠시 명상을 해본다.

커피 향에 집중하기 위한 명상이었다. 향만으로 원두의 품종을 알아맞힐 정도의 전문지식은 1도 없지만, 내가 매일 마시는 커피의 향에 온전히 집중한다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늘 하루는 조금 덜 바쁘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살아보리라 하는.


향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커피를 받아 들자마자 한 모금 후루룩 마시고는 내려놓고 타이핑을 치다가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식어버리는 커피와 처음부터 원래 없었던 것처럼 커피 향도 사라지고 마는 하루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시작부터 커피 향에 집중하고 시간을 잡아 늘렸더니 어쩐지 느긋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이 잔이 비워지면 오늘은 다시는 못 만날 테지만 한 잔의 커피에 충성을 다했다는 마음마저 든다.

이렇게 느리게 마셔도 되는구나, 이렇게 음미를 하니 훨씬 좋구나. 집중해서 맡아보니 커피 향은 꽤나 묵직하구나. 이런 생각들은 커피를 마셔온 몇 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커피 향에 머무는 마음 역시느림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나의 하루 속에서 잠깐의 브레이크 타임을 주는 커피 향.

문득, 만약에 커피에서 이런 향이 나지 않았다면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커피 향을 좋아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낀 오늘이었다.

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것이 평범하게 큰 일 없이 보통스럽고 잔잔하게 보내는 것을 말한다면, 오늘의 커피 향은 아주 특별한 하루를 보내게 해 준 것 같다.

원래부터 있던 것을 이제야 발견한 것 같은 그런 특별한 가치.


여러분도 커피 향을 오랫동안 음미해 보세요.
가만히 눈을 감고 솔솔 피어나는 그 향기에 모든 감각을 세워보세요. 하루가 훨씬 여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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