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길까. 나눌까?

공생에서 상생으로

by 진주

뮤지컬 맘마미아. 무대 위 배우의 목소리가 폭발하듯 극장을 울렸다.


“승자는 모든 걸 차지하고, 패자는 뒤돌아 선다.”


그 한 소절이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 역시 숨이 막히듯 멈춰 섰다. 패자의 울림이 공연장을 압도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왜 세상은 늘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야 할까. 패자는 슬픔을 감내해야 하고, 그 결핍이 때로는 예술이 되어 승화되지만, 결국 사람들은 기쁨이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이기심일까, 아니면 삶을 지탱하기 위한 본능일까. 나는 여기서 다시 묻는다.


“우리 모두가 승자도 패자도 아닌, 함께 상생하는 길은 없는가?”


 삶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이유는 힘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과 마주하는 태도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 태도를 드러내는 말이 바로 ‘겸손’이다. 라틴어 humilitas는 흙을 뜻하는 humus에서 나왔다. 낮은 자리, 땅에 닿은 존재. 본래는 스스로를 낮추는 내적 미덕이었지만, 역사 속에서는 종종 패자와 노예에게 강요된 덕목이 되었다. 승자는 겸손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패자는 겸손을 강요받았다. 오늘의 세상에서도 겸손과 상생의 주도권은 가진 자, 곧 승자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겸손은 단지 인격의 덕목에 머물지 않는다. 지식을 다루는 태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어떤 이는 발견을 감추고, 어떤 이는 움켜쥐며, 또 다른 이는 세상에 드러낸다. 역사는 이런 선택들이 학문의 방향을 바꿔놓았음을 증언한다. 16세기, 3차 방정식 해법을 둘러싼 세 명의 수학자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델 페로는 해법을 발견했으나 흙 속에 묻듯 감췄다. 진정한 겸손 같았지만, 결국 이름조차 희미해졌다. 그의 해법은 제자 피오레에게만 전해졌고, 후일 공개 대결의 불씨가 되었다. 타르탈리아는 가난과 상처 속에서 해법을 풀어냈지만, 시로 암호화해 숨겼다. 명예와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며 결국 배신과 신뢰의 무게를 짊어졌다. 그의 겸손은 사회적 압력에 따른 강요된 겸손이었다. 그러나 카르다노는 달랐다. 약속을 깨고 『Ars Magna』(1545)를 출판했다. 비난을 받았지만, 해법을 공개하며 역사 속 승자가 되었다. 그의 선택은 학문의 확산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승자독식의 구조를 드러냈다.

 이 이야기는 다시 묻는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승자의 선택인가, 패자의 의무인가? 그리고 오늘, 가진 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슬픔이 승화되어 예술로 남는 것도 귀하다. 그러나 기쁨을 나누며 모두가 함께 웃는 상생의 길이야말로 더 아름답지 않을까. 게임이론에서도 제로섬과 논제로섬이 있다. 한쪽의 이익이 다른 쪽의 손실로 직결되는 제로섬 게임과 달리, 협력하면 모두가 이득을 보는 논제로섬 게임도 있다. 삶 역시 승패의 게임이 아니라, 윈윈의 방정식으로 설계될 수 있다. 존 내쉬가 말한 균형처럼, 서로의 선택이 맞물려 모두가 살아남는 구조 말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직업의 귀천을 말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소명 사상은 모든 일의 가치를 평등하게 했고, 산업혁명의 전문화는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가로 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마르틴 루터가 강조한 “직업은 곧 신의 소명”이라는 인식은 노동의 위상을 바꾸었고, 산업혁명은 전문화를 통해 새로운 전문가 집단을 만들었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누구나 재능과 지식을 세상과 나눌 수 있다. 글을 쓰는 이, 영상을 만드는 이, 아이를 돌보는 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이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가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일도 그 연장선에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타인의 경험을 받아들이며 삶을 나누는 행위 자체가 곧 상생의 시작이다.

 과거의 수학자들이 명예와 비밀을 두고 갈등했던 자리에서, 오늘의 우리는 나눔을 통해 모두가 함께 승자가 되는 방식을 배운다. 결핍은 슬픔을 낳을 수 있지만, 나눔은 기쁨을 키운다. 그 기쁨은 단순한 개인의 만족이 아니라, 서로를 붙잡아 주는 공동체의 힘이다. 자연의 법칙은 천적과 공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존재는 경쟁 속에서 다른 존재를 먹고살고, 또 어떤 존재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공존을 넘어설 수 있다. 서로의 성장을 돕고 기쁨을 키워주는 상생의 관계,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풀어야 할 삶의 방정식의 해답이 아닐까. 오늘의 가진 자란, 더 많이 소유한 이가 아니라 더 많이 나누는 이다. 상생과 공생은 멀리 있지 않다. 작은 선택과 재능의 나눔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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