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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llara Feb 04. 2023

고급 쌍화탕

수지맞은 '수리'

*그 남자의 어느날 브런치 세팅




마감일을 앞둔 출판 원고 마무리 교정 작업엔 본의 아니게 밤샘작업이 발생하곤 한다. 수면리듬 정보가 아니라도 규칙적인 생체활동을 방해하는 무질서는 없어야 하거늘... 불꽃의 가늠자인 불혹을 훠얼씬 넘긴 신체 나이에도 젊은 시절의 번역작업처럼 요즈음에 밤샘 교정작업이 이어질 때가 있다.  


이야기 파트너인 아내를 6년째  늦공부에 뺏긴 옆지기는 독서에 의도적으로 심취해 있지만, 나이에 맞게 밤 10시가 채 안되어 책을 손에 든 채 잠드는 '초저녁 잠돌이'가 되기도 한다.


그런 날엔 새벽 4~5시 즈음에 일어나 샤워 후 부엌 정돈을 시작한다. 안방 대의 누나 발치아래 누워있던 하얀 말티스 7살 '수리'가 부엌 인기척을 듣고 문을 긁으면 그이는 안방문을 슬쩍 열어준다. 결국 열린 문틈으로  딸그락 소리들이 새어 들어오고 나는 꿈결에 아스라이 옅은 우렁각시의 소음을 듣는다.


그이는 아내와 딸이 원고작업을 하는 컴퓨터 방 바로 건너편인 서재방 침대에서 햇수로 9년째 머무는 중이다. 32살이던 큰딸의 고단한 수술 후유증이 점점 악화되던 시점에 내겐 낯선 빈맥, 부정맥, 고지혈증, 저혈압, 기립성 빈혈 그리고 고칼슘과 저칼슘을 제멋대로 오가는 칼슘조절 장애와 나트륨등 전해질 불균형, 신부전, 심부전, 자율신경계 조절장애, 자가면역성 질환 등의 병명이 하나씩 더해지며 아내와 딸에게 화장실이 함께 있는 안방의 침대를 내어준 때부터이다.


잦은 병원입원과 의식소실에 의한 부상은 모녀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과 초기 공황장애(panic disorder)를 가져와서 우울구름이 점점 커졌다.


이 남자는 아내와 큰딸이 지인의 권유로 동물응용과학연구를 심리치료제로 선택한 때부터 조금씩 아내와 딸의 손발이 되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녀가 학위논문심사를 받기 시작한 2년 전부터 운전에 이어 부엌에도 익숙해지며 요즘엔 식탁세팅매너까지 탑재한 우렁각시가 되었다. 3년간의 장애학교와 일반초등학교에서 실행한 동물매개치료연구 에도 딸을 위한 도시락 준비와 차편 제공 그리고 기다림으로 동행하였다.  


연구자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회복기의 환자이고, 또 한 사람은 급격한 내리막길 체력의 연령이다. 1+1으로 구성된, 영어에 능숙한 연구팀일지라도 건강한 시절과 달리 눈도 머리도 자주 쉬어야 하니 해외자료수집과 정리를 위한 지속적인 작업효율성이 다소 아쉽다.


신체리듬을 잃는 일이 두려워서 엄마는 큰딸에게 자정즈음에는 침대로 가도록 채근하곤 하지만 큰딸도 읽다만 해외연구자료들을 쉬이 덮고 일어서지 못해 취침시간이  한밤중 1시를 넘나 든다.


그러다 책이라도 한 권 바닥으로 떨어지는 날에는 엄마의 가슴이 잽싸게 쿵 떨어지며 고개가 반사적으로 딸에게 돌아간다. 딸이 넘어진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뇌 속의 신경은 딸의 불상사를 머릿속에 펼쳐 보이며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내달린다. 그래도 '자료 읽고 쓰기에 함빡 빠짐'은  두려움과 우울잡이에 훌륭한 명약이다.


아침에는 잠꾸러기 조건의 미녀 기상시간에 버금가게, 햇살이 밝아진 8시가 넘어서야 일어난다. 덕분에 이번 교재 원고작업은 맑은 머리 덕분에 꽤 효율적이 되었다.


예전엔 '아침 늦잠은 게으른 사람의 표상'쯤으로 치부했던 나는 잠은 깊게 4~5시간 정도면 충분하니 적게 자고 일을 최대로 하는 것을 당연시했었다. '대학입시는'4당 5 락'이라는 급훈을 교실 벽 정면에 걸어두던 세대이므로.


'똑똑~?'

남편이 자다 깨어서 새벽 3시 즈음에 불이 켜져 있는 내 서재를 노크하고 들어왔다. '밤샘은 정말 해롭다'며 짧게 걱정을 건네고, 뜨거운 귤피차를 준비해 주마고 부엌으로 갔다.


아, 쌍화차 내음~

남자는 마음을 바꿔 약국에서 당뇨약을 처방받을 때 서비스로 받은 쌍화차를 데워서 컵에 담아왔다. 컵에 스푼이 들어있다.

'???'

"아, 다방식 쌍화차예요."

"뭐가 달라요?"

"직장 다닐 때 회사 앞 다방에서는 쌍화차에 달걀노른자를 동동 띄워주었거든.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


정말  까만 색상의 쌍화차 위에 작은 노른자가 둥글게 둥둥  있었다. 새벽에 별안간 명동다방식 고급 쌍화차라니...


'비린데...'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내편이 되어준 그이의 배려를 온전히 받아들여서 고급? 쌍화차를 맛보았다. 그리고 쌍화차향을 음미하며 조금씩 홀짝거렸다. 그래도 노른자는 어림도 없다.


"마음은 고마운데 미안해요. 위에 부담되어서 노른자는 살렸네요. 난 이런 차는 한 번도 시도를 못해봐서..."


"노프랍~**"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이는 경쾌하게 컵을 들고나갔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 그이는 '식탐쟁이 '수리'도 쌍화차의 노른자 앞에서는 한참을 고민하더라고 전했다. 그이는 내가 새벽에 내놓은 쌍화차컵 속의 노른자를 바로 수리에게 주었단다. 큰누나의 혈액순환을 위해 준비한 구운 연초록 은행까지  뺏어먹는 식탐쟁이 '수리'도 쌍화차 속의 노른자 앞에선 좀 머뭇거리더란 말이지.


'삶은 달걀은 엉덩춤을 추며 좋아하는데... 쌍화차향이 많이 강했었나?'


사실 옆지기도 '쌍화탕 속의 어중간한 날것으로 남겨진 노른자를 먹기는 좀 그랬다'라고 했다.


'헐, 그런데 나더러 낯선 쌍화탕 노른자를 먹으라고?'

그래도 그 새벽에 깨어서 아내를 위한 따뜻한 차를 끓여내 온 그 남자는 진정한 옆지기이다.


뒤늦게 동물매개치료 해외 학술지 읽기에 흠뻑 빠진 나는 언제 이 남자를 위한 진정한 옆지기 노릇을 할 수 있을꼬? 이번 원고의 마지막 교정작업이 끝나면 오랜만에 안국동 전통 쌍화차 찻집에 셋이 함께 나들이 가야겠다. 아, 덕수궁 찻집의 진하게 달인 대추차도... 하루에 두 곳을 모두 들러도 좋겠다. 오래 말벗을 양보한 그 남자와 함께라면... 


어쨌건  수리는 오늘 쌍화탕에 빠진 노른자를 독차지했으니 수지맞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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