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와 비혼 아줌마의 중년.
7화. ^^;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
아줌마 친구가 멕시코로 돌아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허전하다. 두 달 동안, 마음을 나누며 붙어 있었다. 굳이 아줌마 친구가 아니더라도 만났다가 헤어지는 일들은 잦다. 그럼에도 철없던 시절의 웃음을 되돌려 준 아줌마 친구가 떠나니 은근한 상실에 젖는다.
일반적으로 상실하면, 만성적인 슬픔을 낳는 죽음을 떠올린다. 그래서인지, 잠시의 이별과 같이 일상에서 맛보는 상실은 잊힐 수 있다. '너무 중요해' 했던 것의 상실이 오랜 감정을 남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른 체 말라'. 일상적이든, 나이 드는 점진적인 것이든, 죽음처럼 최종적인 것이든!!! 상실은 저마다의 감정을 남긴다.
'할머니 됐다는데', "벌써?????' 아무리 찾아도 아줌마 동료친구 한 명이 카톡에서 보이지 않는다. 손녀가 너무 예뻐, 손녀 사진과 이름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첫째, 결혼했어?', '코로나? 였잖니~~' 태연스레 말을 한다. 이 아줌마?. 이제는 할머니가 된 아줌마 동료친구는 결혼도 그랬다. 이승철이라는 가수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같은 이름의 남자를 만나 갑자기 갔다. 술맛은 또 어찌 그리 아는지, '한잔 꺾어야 하는데... ' 대낮에 만나느냐며, 꽁시렁 댄다.
'할머니 돼서, 괜찮고?', 어......... '그렇지' 한다. 대수롭지 않은 듯 보여도, 중년에 경험하는 상실은 나이 드는 것과의 관련을 따로 떼어놓기 어렵다.
아들이 품을 떠나 독립했다. '시원해' 하더라도, '엄마'로 불린 세월 안의 희로애락 감정이 남아있다. 잘 알아줘야 한다. 한동안 아끼던 물건을 놓아도 며칠이... 속상할 수 있다. 하물며, 애지중지 키운 첫 자녀의 독립이랴, 싶다. 만 가지 마음과 생각이 교차하며, 빈둥지의 허전함!!! 찾아오기도 한다.
상실로 경험하는 슬픔의 강도는 저마다 달라 비교하기는 어렵다. 둘째 아들이 지적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야 한단다. '안 그래야 하는데.... 자꾸 내 탓을 하게 돼', 아줌마 선배가 슬픔을 나눈다. '아니야', 위로하지만, 평생 지고 갈 슬픔이 안쓰럽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남편을 보낸 아줌마 언니에게는 '어떠냐고' 잘 묻지도 않는다. '갑자기?............' 그날의 충격들이 다들 맘에 남아 있다. 검정 한복을 입고 초연하게 맞은 아줌마 언니의 모습이 슬펐다. 누구나 아는 드러난 상실이었다. 그럼에도 죽음에 서툴고, 아픔이 거대해서, 얼른 슬픔을 끝맺으려 한다.
학교 졸업 후, 풋풋했던 20대에 만난 H사의 동료, 선배 아줌마들이다. 순수한 나이, 처음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중년이 되어서도 연을 이어온다. '언니는 괜찮나?', '톡 사진 보니, 좋은 것 같은데'. 마음에 묻은 상실의 슬픔을 섣불리 퍼내지 않으려, 뒤에서 묻는다.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슬픔이기도 하므로, 그런다.
몇 해? 이 중 둘은 몇십 년 만이다. 간만 만난 반가움의 자리에 상실이 머물 자리는 없는 듯하다. '여직, 못 먹어 ~?', 아줌마 동료친구가 놀린다. '위장은 괜찮고?' 비혼 아줌마도 찡긋한다. '확실히, 나이는 못 속인다. 한 병으로 줄였다', 하하 호호한다. '인생, 뭐 있냐? 건강하게 살면 되지' 건배다.
그동안의 슬픈 한 숨을 뒤로 아줌마 선배도 아들 자랑에 바쁘다. '우리 아들!!! 뉴스에도 나왔어~~~~~봐봐'. 지적장애를 뛰어넘어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직장에 취직이 되었단다. '와~~~~~~~!!!! 이 취업 대란의 시대에?!!!!', 뿌듯함, 대견함, 뭉클함 안에 뿜어지는 축하소리에 속이 다 시원했다.
자녀의 신체적 상실에 슬퍼했던 아줌마 선배가 한시름 놓는 기쁜 시간이 아닌가. '장하다', '잘됐다' 다들 제일처럼 아줌마 선배 아들일을 기뻐했다. 상실로 인한 아픔을 비교는 못해도, 잘 견뎌온 자신들을 보는 듯 그런다.
아차, 기쁨 속에 잊었다. '너 보여?', 다시 주문을 못하는 중년의 애잔함이 금세 찾아왔다. 에구^^; 상실의 그 자리에 잠시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