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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연 Oct 22. 2024

함께, 둘이 함께

태초의 큰 울음, 빛이 공허의 틈을 파고들 적에

세상 만물 역시 비로소 형과 태를 잡아갈 적에


너의 숨결이 잠시 내 귓가에 닿았던 것도 같아.


우리가 빛의 파편으로 얽혀있었을 즈음

그래, 바로 그 때 

나는 네 품에 안겨있었어.


함께.

둘이 함께.


노랫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설운 어둠 속을 달려 

우리는 푸른 별에 이르렀지.


햇빛조차 들지 않는 

어딘가의 숲,

수천년을 외로이 서 있던 나무는

자신의 몸을 찍어내는 도끼날을 반겼을까.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잎사귀만을 수줍게 떨구었을까.


기꺼이 스러지는 나의 세상은

흰 종이가 되어, 

너라는 색으로 물든다.


머리카락마다 곱게 번져가는 농염한 달빛과

서로를 닮은 꽃, 별을 빚는 속삭임.

나는 어느덧 두터운 책 한권으로 거듭나,

모든 것을 가슴 속에 틔워내고,

역사를 써 내려갈 네 책의 첫 장이 된다.


잘려나간 나무둥치, 지친 네가 앉아 쉴 수 있다면.

태초의 그 날처럼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면.

연달아 내리치는 아픈 도끼질도 인내하고 또 감내하리,


언젠가 반드시 마침표가 찍힐 유한한 삶일지라도

영원을 살아갈 글이 되어,

빛으로 되돌아갈 그 날까지.


함께.

둘이 함께.






연인에게 주었던 사랑 시.


빅뱅을 '태초의 큰 울음'으로 표현했고, 한 때 우주의 별먼지 였을 우리 두 사람을, 빛에 기댄 혹은 얽힌 이들로 묘사했다. 무수한 시간을 지나, 지구에서 간신히 생명으로 태어났을 때, 나의 첫 생은 아마 나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감사한 아픔을 안겨주는 그는, 분명 도끼날이었겠지. 서슬퍼런 도끼를 휘두르던 나무꾼이었겠지. 한 권의 책으로 다시 생을 얻은 나는 그의 일기장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의 역사를 온 몸으로 받아내었을 것이다. 숲에 남은 작은 둥치는 편안한 의자로 써주었으면 했다. 우리가 다시 우주의 별먼지 혹은 하나의 빛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함께, 둘이 함께 지내길 바란다는 예쁜 마음으로 써내려 갔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진실된 마음으로 적었던 시. 연이은 아픔에도 수줍게 잎사귀만 떨구었던 나, 그 시절의 애틋함을 돌이켜보며 옅게 미소짓는다. 묵은 글 속에서 만난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랑에 빠져있다. 그녀는 젊고 당돌하다. 서럽거나 불행하지도 않고 밝고 정숙해 무척 사랑스럽다. 나는 그녀가 참 마음에 든다. 시를 읽을 때면 언제나 그녀와 마주할 수 있다. 


감정과 기억은 옅어져도, 글은 남는다. 우주의 별먼지 또는 별빛이 되기까지 나와 함께 하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사랑이란 감정 그 자체가 아닐까. 사랑을 속삭이기 위해 적었던 시들이 아닐까. 그리고 그 시 속에 남겨진 어린 날의 내가 아닐까. 육신이 사라진 후, 만년을 더 살아낼 나의 청초한 영혼이, 그 짧막한 시들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랑을 경험하고, 그만큼 많은 시를 남기고 싶다. 어여쁜 그녀와 더 많이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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