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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미정 Oct 19. 2023

겸손한 스티커

위험한 애인에게는 취급 주의 라벨을 부착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등에 푸른 꽃이 폈다 지곤 했다

꽃을 가리던 파스의 접착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꽃무늬로 포장된 나의 겉은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가 수집하는 포켓몬이 늘어갈수록 파스의 냄새는 짙어졌고

오랫동안 압류된 나의 정신은 사용법을 잃어갔다

     

그가 온다는 문장은 불안하다    

 

나를 떼어냈다 붙이고 붙였다 떼어내고

밤부터 시작된 그의 스티커 놀이는 새벽에야 멈췄다

찢긴 포켓 몬스터 빵 봉투에서

내 근육의 가장 깊은 곳이 몽롱해질 때까지 

피카츄, 꼬부기, 잠만보를 외웠다  

   

앞면은 토요일 

뒷면의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랬다

     

방전된 핸드폰. 보호받지 못한 액정에 생긴 실금들

나는 깨진 유리처럼 언제 버려질지 몰랐다

규칙 위반이란 낱말들이 벽마다 붙었다 

    

밤마다 검은 등에 혹이 자라고

집착과 접착의 모호한 경계가 어디쯤인지도 모른 채

여러 날의 아침을 부인하다 나는 또 밤이 되어 갔다 

    

나의 스티커는 오늘도 그에게 여전히 겸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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