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흰나비가 너른 설원을 노니는 꿈을. 간밤엔 뜨끈한 감촉이 내 머리를 훑고 지나간 듯했다.
손등을 타고 번져오는 한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그만 뒤척임으로 이불속에 꽁꽁 싸매고 있던 손이 튀어나와 번개처럼 정신이 번쩍 깨어난 것이다. 나는 이제 막 잠에서 깨 찌뿌둥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뻑뻑한 눈을 억세게 비비고는 있는 힘껏 하품을 내질렀다.
‘몇 시지?’
이제야 조금 풀어진 눈꺼풀을 힘겹게 뜨고는 방의 한구석 작은 선반 위에 놓인 앞유리 없이 초침이 도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 4… 20분.’
추워서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눈이 떠진 모양이다. 내가 일어난 옆자리에는 평평하게 정리된 이불 위로 흐트러진 아빠의 베개가 놓여 있었다. 어제는 아빠가 집에 빨리 들어와 종이와 연필을 주었고 아빠랑 같이 재밌는 그림을 잔뜩 그렸다. 코끼리 코가 달린 사자, 아빠랑 꼭 안고 자는 그림 같은 것들. 그리고 이불 주변에는 어제의 흔적이 어질러져 있었다.
‘저건 뭐지?’
빨간빛, 보랏빛 꽃들이 만개한 양은밥상 위에 그린 적 없던 종이가 있었다. 나는 밥상 앞으로 꾸물꾸물 기어가 그 종이를 집어 들어 소리 내서 읽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집에 안 들어와. 쌀 많이 넣어 놨어. 밥 꼭 먹어.”
종이에는 아빠가 일하러 집에 더 오래 안 들어올 거라서 먹고 자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구비해 놓았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집에 더 오래 안 들어온다고..? 평소에도 세 밤, 네 밤 정도 자야 집에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많이 자야 집에 오는 걸까? 잘 모르겠다.
언제까지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어린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마당의 수돗가로 걸어 나갔다. 점점 서늘해지고 있는 날씨에 몸이 잘게 떨렸지만 씩씩하게 수돗가에 도착해 지하수 펌프 옆에 있는 물이 가득한 양동이에서 마중물을 펐다.
이젠 벌써 6살이 되어서 펌프질도 알아서 척척 해낼 수 있었다. 아직 마중물을 퍼서 펌프에 붓는 일은 조금 힘들었지만 손잡이를 꽉 붙잡고 위아래로 펌프질 하는 일은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은 듯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왈칵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콸콸 흘러나오는 물을 한 방울이라도 놓칠 세라 다급히 옆에 세워져 있던 빛바랜 고무대야를 아래에 받쳐 놓고서는 가득 채워진 물로 찰방찰방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살이 에이는 것 같은 냉수로 허겁지겁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얇은 내복 차림으로 조금만 더 밖에 서 있다가는 손끝, 발끝이 꽁꽁 얼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눈에 물이 들어갈까 꼭 감은 눈으로 더듬더듬 길을 찾아 들어가며 얼굴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들이 쪽마루의 나무 바닥에 물 자국을 남겼다.
방에 들어와 옷걸이에 걸려있던 수건에 얼굴을 부벼 물기를 닦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이부자리와 그림이 그려진 종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림종이들은 하나하나 모아서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이불은 차곡차곡 접어 장롱에 넣어놨다. 마지막으로 베개 두 개를 포개 넣으려는 차에 아빠의 베개가 눈에 보였다. 작은 내 것과는 달리 커다란 아빠의 베개. 품 안에 가득 들어오는 아빠의 베개를 조심스레 끌어안고 살며시 코를 묻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콧속을 메우는 묵직한 아빠의 향기가 좋아서 이대로 멈춰 움직이기 싫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아빠의 베개를 끌어안고 있다가는 아빠의 향기가 다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하고 정리를 끝마쳤다.
옷을 입기 위해 작은 서랍을 열어 두꺼운 외출복을 골랐다. 세수하러 나갈 때 느껴졌던 바깥공기를 생각하자니 단단히 싸매고 집을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몇 없는 외출복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남색 윗도리와 무릎께가 거칠거칠하게 일어난 청바지를 골라 입었다. 윗옷은 뭐가 묻었는지 작은 얼룩이 져있긴 했지만 그래도 잘 보이지 않아서 괜찮았다. 목도리를 예쁘게 매듭지어 매자니 너무 어려워 그냥 목에 뱀처럼 둘둘 말았다.
쇳소리 나는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서니 차가운 공기가 콧 속을 파고들어 몸 안이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린이 도서관에 가서 재밌는 책을 마음껏 읽을 생각에 그것마저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높은 동네산 위에 있는 우리 마을은 기울기가 가파르고 길이 험해서 항상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바닥에 물이라도 얼어 있으면 미끌미끌 큰일이다. 내가 가려는 어린이 도서관은 산 너머 주택단지에 있어서 열심히 걸어가야 조금이라도 더 책을 볼 수 있다. 어제 아빠랑 같이 자기도 했고 오늘도 하루도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배싯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