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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이 올라간 요거트볼

사라지다 살아지다 또 다시 살아내려 애쓰고 애쓰다

by 숨고

사라지다 살아지다 또 다시 살아내려 애쓰고 애쓰다


어떤 장소를 갔을 때, 처음이지만 특별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일상적인 느낌이 아닌 뭔가 새로운 자극을 주는 환기의 장소 같은 곳. 이렇듯 끌림이 온다는 것 무엇일까? 한 가지 색과 한 가지 옷을 입고 우리를 동일화시켜 획일화된 존재로 의미를 부여하는 유니폼 같은 것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으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끌림 말이다.


살다 보면 나의 개성을 살리기란 쉽지만은 않다. 맛도 멋도 그러하다. 사람들 또한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이에게 우리는 끌리곤 한다. 그래서인지 각각의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가듯 나만의 색으로 살아간다.


어느 나의 세 번째 고향, 그 도시에서의 삶을 돌아보다가 집 앞 가장 멋스러웠던 카페 하나를 떠올린다. 그 카페는 창문이 여러 개 겹겹이 펼쳐진 곳이었다. 내가 자주 앉던 자리는 특별히 창가 맨 끝 자리였는데 그 구석진 자리가 그때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도 좋았고. 나만의 공간에 틀어박혀 있는 듯해서 좋았다. 구석구석 그 자리마다 주는 느낌이 다르고, 가구도 커튼도, 책장도 다른 색과 다른 결의 나무들로 이루어져 그 공간만의 개성이 좋았다.


개성이 있으면서도 하나하나의 색감과 결들의 조화가 참 부드러웠다. 그 공간에서 자주 일기를 끄적이곤 했는데. 글자를 하나하나 적어 내려갈 때마다 내가 살아가는 순간이 기록되고. 그날의 고충과 번뇌와 사색과 잡념들이 뒤섞여 글자로 녹아내려지니 조금은 털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일기장은 내게 머릿속을 비우고 마음속을 청소해 주는 분화구 같았다. 혼자 갈 때는 늘 그 곳만의 쿠키를 먹었고. 마감 한 시간 전 심야일기를 적기 위해 집 앞을 산책 삼아 나가 들를 때는 한 밤 중이라 따뜻한 캐모마일을 마셨다. 사장님께서는 손목에 항상 보호대를 차셨는데. 그때는 그분의 손수 만들고 내리는 커피에 대한 진정성이 그 손목보호대라는 걸 몰랐다.


항상 들렀지만 말이 없이 내가 주문한 메뉴를 달게 받아주시곤 조용히 만들어 내어 주셨고. 내가 혼자 소중히 여기는 '밤에 쓰는 일기 시간' 을 존중해 주시듯 정말 살금히 음료와 쿠키를 내어주시곤 하였다. 그 고구마쿠키는 그 분만의 방식의 반죽이라 아직도 그리운 식감과 맛 중 하나인데. 지금은 있으련가 모르겠다.


이와 달리 핏줄이신 지안엄마와 그 카페에 갈 때는, 벌집과 이런저런 견과류와 손수 발효시켜 주신 요거트 볼 세트를 먹었는데. 그때 먹었던 진득한 꿀의 식감과 이에 붙는 끈끈함 마저 불쾌하지 않은 건강한 달콤함이 발효 요거트와 중화된 맛이 좋았다. 그 맛이 이제는 조금씩 흐릿해져서 다시 찾아간대도, 그때의 맛이 그곳에 있으려나 궁금해진다. 살아가도 살아가도 내가 자주 가던 음식점과 디저트점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은 참 애석한 일이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걸 느끼고 나누고 맛보았는데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사람에게 많은 걸 주고 느끼고 배웠고 바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애석하리 갑자기 사라진단 말인가. 사는 게 뭔가 사라지고 그래도 살아지고, 또 그러다 사라지면 또 살아내려 애쓰고 애쓰다 또 사라짐을 반복하는 굴레 같다. 막연한 삶, 막막한 삶 그래도 또 태어나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끊임없는 마라톤 경주와 같다. 달리고 달려도 끝이 없는 것. 그래도 우리는 달려야만 살 수 있다는 것. '엄마 아프지 않은 건 삶이 아니야.'라는 나의 시 한 구절이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힘겨워도 마음껏 힘들 수 없는 게 더욱 애석하다. 보고 싶다 나의 세 번째 고향. 그곳의 곳곳 나들이. 그립다 당신과 걷고 나눈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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