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30분.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생각한다. 한 꼭지를 출근 준비 전까지 쓰려면 잠든 뇌를 빨리 깨워야 한다. 물 한 컵 시원하게 마시고 다시 책상에 앉는다.
타닥타닥
새벽 속 고요함 때문인지 쓰고 싶다는 열망 때문인지 회사에서 일할 때의 키보드 소리보다 우렁차다. 어느덧 출근 준비 시간이 다 되었다. 퇴근하고 마저 수정하자며 얼른 준비를 한다. 만원 가득한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 어깨 틈 속에서 휴대폰 노트 앱을 켠다. 다음 소목차 아우트라인을 잡는다.
다섯 번째 회사를 다닐 때였다. 회사가 상장 준비 중이라 그룹사와 회계법인으로부터 자료 요청을 받고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이었지만 이마저도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실력은 출중하였는데 젊꼰의 대명사였던 직속 상사는 그 위 상사와의 트러블로 자진 퇴사하여 새로운 부장님이 오셨다. 그 부장은 일손이 부족하다 여겨 자기 사람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전임자들이 줄줄이 퇴사하여 장부가 많이 밀린 상태였다. 새로운 직원들과 부장과 나까지 넷이서 주말 출근과 평일 야근을 반복한 뒤에야 업무의 안정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일이 손에 익고 사람들이 더 이상 퇴사하지 않게 되자 나도 평화로워졌다. 갑작스러운 평온함에 나는 또 무엇을 해볼까라는 버릇이 발동됐는데 그때 떠오른 게 글쓰기였다. 이후 책 쓰기 아카데미를 등록하여 원고를 쓰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배웠다. 콘셉트를 잡는 법, 메시지를 도출하는 법, 목차 기획, 서문 작성, 글쓰기 방법 등 책을 출간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배웠다.
당시 아카데미를 이끌었던 출판사 소장님께서는 ‘누구나 자기만의 특별함과 방법론이 있다’는 걸 강조하셨다. 매일 똑같은 루틴으로 업무처리를 하고 있던 내게 강한 울림을 주었다. 나에게도 특별함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걸 소장님께서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중 나에게서 발견된 콘셉트는 ‘연애’였다. 짧은 연애만 주야장천 하다가 지금의 안방 남자와 4년 넘게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골인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연애 철학을 소장님께서 매력적으로 봐주셔서 이 콘셉트를 주제로 선정하고 목차를 기획하였다.
9주간의 아카데미 과정을 종료하고 디데이를 잡아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큰 목차 5개를 세우고 하위 항목으로 36개의 꼭지를 잡았다. 이틀의 한 개의 꼭지 쓰는 걸로 목표로 수정까지 3개월 내로 계획하였다. 주로 퇴근하고 밤에 원고를 썼는데 당시 글을 써본 적이 없어 아무리 읽어봐도 엉망이었다. 수정을 거듭해야지 만이 그나마 읽을 수준이 되었다. 수정이 길어지자 저녁 시간만으로 부족하여 새벽 시간을 활용하였다. 6시부터 출근 준비를 해야 해서 5시에 알람을 맞춰놨는데 점차 4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당시 내 머릿속은 이번 꼭지는 무엇을 쓰면 좋을지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몇 번의 꼭지를 써보니 무작정 글을 쓰는 것보다 미리 고민해 보고, 키워드를 뽑은 다음 하고 싶은 메시지를 추출하여 쓰는 글이 더 수월하였다. 신기하게도 책상에 앉아서 키워드를 뽑는 것보다 만원 지하철에서 휴대폰 메모장 앱을 켜놓고 고민하는 게 훨씬 잘 되었다. 옆에 누가 있든 없든, 사람들 사이 어깨가 끼어있든 상관없이 그 순간 메모장 어플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1시간 걸리는 출퇴근 길이 또 다른 초고 작업 시간이 되어주었다. 어떤 때는 아이디어가 생각나 신나게 앱에 적고 있을 때 도착하여 내려야 할 때면 그 시간이 아쉽기까지 하였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빨리 업무를 끝내고 꼭지 글감을 생각하고 싶어 일의 속도가 빨라졌다. 옆에 앉은 직원이 “요새 뭐 좋은 일 있어요?” 물을 정도였다. 전엔 그냥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니까 무미건조하게 일 처리를 하였는데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그걸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끝내야 된다고 생각하니 그저 하고 있는 일 자체가 즐거웠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이었다.
가을에 시작한 초고 쓰기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끝이 났다. 12월 31일로 마감 날짜를 잡아놨는데 예상보다 일주일 더 앞당겨졌다. 그런데 초고를 끝낸 기쁨도 잠시, 공허함이 밀려왔다. 앞으로 무슨 재미로 회사를 다녀야 하나, 꼭지를 추가해서 더 써볼까 할 정도로 아쉬웠다. 글감 없이는 지옥의 출퇴근길을 겪고 싶지 않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어느새 내 삶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기쁨을 맛본 것이었다.
이제야 ‘내가 좋아하는 일’ 하나를 찾은 것 같았다. 원고를 글쓰기 연습장 삼아 글쓰기가 이렇게 신통방통한 행복을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내가 또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를. 왠지 또 좋아할 만한 다른 일이 분명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그냥저냥 좋아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허송세월로 보내는 것보다, 다소 전문적이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삶을 사는 삶이 더 행복한 삶일 것 같았다. 인생은 짧다고 하는데 그 짧은 인생을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살기 싫었다. 나는 마지막 용기를 내기로 하였다.
때마침 여의도에 있던 회사가 경기도 지역으로 이전 준비 중이었다. 1시간 걸렸던 편도 출퇴근 시간이 무려 2시간 가까이로 늘어났다. 오래 걸리는 출퇴근 시간이 퇴사 이유로 꽤 적당하였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2021년 1월 11일은 다섯 번째 회사의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오전 근무 후 팀원들과 점심 회식을 하고 퇴근, 아니 퇴사를 하였는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오후에 책 쓰기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출판사 소장님과 미팅이 잡혀 있었다. 퇴사 결심을 한 뒤 며칠 후에 소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내 원고를 본 소장님께서 원고가 재밌어서 편집부에 돌려서 읽어보게 하였는데 평이 나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나만 괜찮으면 다른 출판사에 투고하지 말고 바로 출간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하셨다. 6년간 다섯 번을 퇴사하였는데 가장 잊을 수 없는 퇴사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