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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은 홍시가 된다 Aug 18. 2024

절대 찾아갈 수 없는 도쿄 식당에서 밥 먹은 이야기

인터넷에도 나오지 않는 식당이 있다


세무서에 가서 완전귀국에 필요한 행정 업무를 마치고 근처에서 밥을 먹기 위해 늘 그렇듯 구글 지도를 켰다. '음식점'으로 검색해 보니 근처 중화요리점, 라멘 가게, 소바 가게 등이 표시되었다. 볶음밥이랑 만두나 먹자 싶어, 가까운 중화요리점까지 3분 걸어갔더니 초록 글씨의 '영업 중' 문구를 말끔히 무시하듯 셔터는 무심히 닫혀있었다. 결국 조금 걸어가 무난하게 소바를 먹기로 하고 방향을 틀었다.


옆 동네지만 도쿄는 넓고 골목이 많은 탓에 잠깐 산책만 해도 '이런 곳이 있었다고?'의 연속이다. 이 날도 구글 지도를 켜고 처음 가보는 소바 가게 체인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택가의 골목을 하나 거쳐서 가야 했는데, 어느 주택에 화이트보드가 덜렁 걸려있는 게 아닌가.



구글 지도를 뚫어져라 보며 걷고 있었던 나는 눈앞의 노란 주택과 스마트폰 화면을 번갈아 봤다. 간판도 없고 구글 지도에도 아무런 표시가 뜨지 않았다.


식당 안에 들어가 캡처한 구글 지도. 아무것도 없는 주택가다.


참고로 이곳은 도쿄 니시아라이 세무서 근처다.


아무튼 그 화이트보드에 적힌 내용을 읽어 보니 영락없는 식당 메뉴였다.



식사 세트(1,100엔~)
- 야채샐러드와 커피, 차 포함 -
 ⊙ 해물 그라탕
 ⊙ 단호박 달걀 그라탕
 ⊙ 가지 그라탕

 (김치볶음밥, 삼겹살볶음밥도 있었으나 오후 두 시 반이 되자 지우개로 슥슥 지우셨다.)


'영업 중'이라 적혀 있는 문패.


조금 망설였다. 소바 체인점에 가면 머릿속 안테나를 속속 세울 필요 없이 편안하게 주문과 식사, 계산의 과정이 이루어질 텐데 굳이 모험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만화 <진격의 거인> 주인공 에렌이 그러했듯 인간의 탐구심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  내부가 어떠할진 모르겠지만 우선 들어가 보기로 한다.


홀로 식사 중인 할머니 한 분.


저... 지금도 하고 있나요?


당연히 영업 중이라는 문패를 보고 들어왔으니 영업을 하고 있을 터였지만 왠지 한 마디 건네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노부부였는데, 나를 본 부인이 "네, 하고 있어요." 담백하게 답변을 해 준다. 낮 2시, 점심을 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단골손님으로 보이는 할머니 세 분이 이미 앉아 식사를 하고 계셨다.


온통 목조로 가득한 공간에서 나는 어디에 앉으면 좋을지 잠시 서서 망설였다. 비어있는 테이블은 카운터석과 4인석, 6인석이었는데, 카운터석은 부담스러웠고 혼자 왔는데 4인석에 앉아도 되려나? 싶었지만 손님이 더 오지는 않겠거니 싶어 홀로 4인석을 차지하는 사치를 누렸다.


곧바로 메뉴판과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였다.


바깥에 걸려있던 화이트보드와 같은 메뉴였지만 글자가 좀 더 추가되어 있었다. 수제 건포도호두파운드도 판매하고 있는 듯했다. 원두도 판매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조금 시간을 두고 얼음물이 담긴 컵과 물티슈를 들고 오셨다. 그러고는 바로 메뉴를 들을 기세였다. 실눈을 뜨고 앞에 보이는 칠판을 찬찬히 읽어보는 시늉을 하며, 대충 단호박이 적혀 있는 그라탕을 부탁했다.


커피와 차 중에 어떤 걸 마시는지도 물어보셨다.

씁쓸한 아메리카노는 안 마시는 편이지만,

예외적으로 일본 특유의 '식사 후 커피 제공되는 식당에서 나오는 커피'는 참 좋아해서 "커피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우유를 넣을 것인지도 물어보셔서 넣어달라고 했다. 한국에는 아메리카노에 우유를 넣어먹었던가?

일본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는 그냥 드립커피에 우유를 조금 섞어 먹는 경우가 흔한 것 같다.

실제로 부드럽고 고소해서 맛있다.

 


주문이 들어오면, 카운터석 너머 중년의 노부부께서 요리를 시작하신다.


주문을 하고 나니 주변이 좀 보인다. 그나저나 도대체 이곳의 정체는 무엇인가? 주변에 사는 단골들이나 지인들이 아니면 찾을 수도 없을 법한 위치에, 간판도 없고, 입소문으로 승부 보는 곳인가 싶어도 요즘 세상에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리뷰 같은 게 한 글자 없는 기묘한 식당이었다.


간판이 원래 없는지, 언제부터 운영을 하셨는지, 운영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소심한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옆 테이블에서는 할머니 두 분이서 커피를 마시며 도란도란 수다타임을 즐기고 계셨다.

온통 짙은 나무색이 가득해서 앉아있기만 해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전채 요리로 나온 야채 샐러드.


샐러드가 먼저 나왔다. 소스병도 옆에 가져다주셨다. 고구마 슬라이스와 토마토, 양상추, 오이 등을 드레싱으로 버무린 간단한 샐러드였는데 어찌 그리도 맛있던지. 아삭아삭한 식감, 고소한 풍미가 더운 계절에 지친 입맛을 최고조로 높여주었다. 어떤 드레싱을 쓰는지 당장이라도 여쭙고 싶었다.



단호박달걀그라탕과 바게트


오븐의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얼마 안 있어 음식이 나왔다. 따뜻하게 구워진 바게트도 두 조각 올려져 있었다.

한 입 떠서 먹자 벌써 커피를 내어주셨다.


우유가 조금 들어간 커피


쓴 것을 즐기지 못하는 입맛이라 늘 옆에 딸려오는 시럽 캡슐을 전부 털어 넣는다. 음, 역시 아주 맛이 좋다.

그라탕도 빵도 샐러드도 커피도, 아주 깨끗하게 클리어했더이다.

배부르게 음식값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섰다.


식사 중이던 손님들은 역시나 단골이었는지,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마다 사장님은 "매번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참으로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오고 싶은 장소가 한 곳 더 늘었다. 그런 맛에 무서워도 계속해서 새로운 곳을 탐방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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