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본질, 그리고 차례상의 의미

by 양창호

1.

성균관이 몇 해 전 추석을 앞두고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했다. 간소화 방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전을 부치느라 더는 고생하지 말라는 것과 음식 가짓수는 최대 9개면 족하다는 것이다.

표준안에 따르면 간소화한 추석 차례상의 기본 음식은 송편, 나물, 구이, 김치, 과일, 술 등 6가지다. 여기에 조금 더 올린다면 육류, 생선, 떡을 놓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성균관 측은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을 차례상에 올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기름진 음식에 대한 기록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사계 전서’에 나오며, 밀과나 유병 등 기름진 음식을 써서 제사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김장생은 이이의 제자이자 서인의 영수였고 예학을 집대성한 분이다. 낮은 관직에만 있었으나 조선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명이다. 특히 예학에 기여한 바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이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현급이며, 가정례 정착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실제로 원래 유교에서는 차례상과 제사상을 구분하였으며 차례상은 간단히 차와 술, 다과만을 올리고 제사상은 화려하게 각종 전통음식을 예절에 맞춰 올렸다 한다. 따라서 차례상을 제사상과 달리 간소하게 하는 것을 일반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차례상이 어떤 의미와 목적으로 차려지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리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고, 이를 통해 유교의 의식과 전통이 올바르게 전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성균관에서는 지난 세월 꾸준히 표준 제사상, 표준 차례상을 발표하면서 가정례 간소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번에도 성균관에서 김장생의 의례를 들어 차례상 간소화를 발표한 것이다.


2.

그러나 이러한 간소화 권고가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복잡한 문제다. 지난해 추석, 한 지인은 시댁에서 “성균관에서도 전 안 부쳐도 된다고 했다”며 간소화를 제안했다가 시어머니로부터 “그건 집안마다 다른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결국 그해도 20가지가 넘는 음식을 준비했다. 권고안이 있어도 집안의 전통과 어른들의 뜻 앞에서는 무력했던 것이다.

반대로 또 다른 친구는 성균관의 발표를 반기며 “이제 떳떳하게 차례를 안 지낼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간소화가 아니라 폐지의 근거가 된 셈이다. 이 간소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애초에 차례나 제사를 하기 싫을 뿐, 그 규모를 줄여서라도 하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차례나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유가의 주장에 큰 효과가 없을 수 있다. 나의 경우는 매년 명절 일주일 전부터 준비를 시작한다. 특히 녹두지지미는 내가 해야 맛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해드리지 못한 것들을 이렇게라도 하는 심정이다. 조부모님, 부모님께 드리는 정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유가가 나서 그 정성을 간소화하라고 하는 데는 큰 감흥이 없을 것이다.

자칫 제사를 싫어하는 층만 고양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이러한 간소화 논쟁을 성균관 같은 유학의 정종에서 나서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3.

예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책으로 출간한 가까운 선생님에게 여쭈어 볼 기회가 있었다. 몇 년 전 어느 가을날, 선생님의 연구실을 찾아뵙고 차를 마시며 여쭈었다. “예는 어떤 것입니까?”

찻잔을 내려놓으신 선생님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천천히 말씀하셨다. “차례나 제사는 중요한 예이지만, 예는 깨닫고 느낀 것에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드릴 때는 예는 엄격한 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답변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는데, 예측과 다른 답변을 주신 것이다. 선생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제사상에 몇 가지 음식을 올려야 하는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 그 음식을 올리는지, 그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지가 중요한 거지요.”

돌아가신 부모님 등 조상님에 대해 어떤 정성을 담아 예를 행하는가는 부모님 등 조상님에 대해 깨닫고 느낀 만큼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예를 행할 때 그 결과가 사랑이라고도 말씀하신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작년 설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조카가 처음으로 제사에 참여했던 날이었다. 일곱 살 난 아이는 어른들이 음식을 차리는 것을 신기하게 지켜보다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아이의 아버지가 대답했다. “하늘에 계시지.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이렇게 준비하면 할아버지가 오시는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도 과일을 닦겠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예는 단순히 음식의 가짓수나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세대를 이어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4.

제사 지내기를 싫어하는 젊은 세대가 수백 년 동안 현상으로 나타났겠지만,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것은 이 예가 법으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30대 부부가 명절 제사를 어떻게 지낼지 고민하는 장면이 나왔다. 남편은 “우리 세대는 제사의 의미를 모르겠다”라고 했고, 아내는 “그래도 부모님 생각하면 뭔가는 해야 할 것 같다”라고 했다. 결국 그들은 소박하게나마 음식을 준비하고, 부모님 사진 앞에서 절을 했다. 형식은 간소했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지했다.

차례와 제사를 정성껏 잘 차려서 손주부터 할아버지까지 가족들이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조상을 회고하고 가족 구성원의 현재와 미래를 얘기하는 것이 곧 예를 행하는 것이고 가족 간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내 친구 하나는 명절 때마다 “제사는 귀찮지만, 그래도 온 가족이 모이는 유일한 날”이라고 말한다. 차례상 앞에 모인 가족들은 음식을 나누며 일 년간의 이야기를 나눈다. 누가 취직했고, 누가 아프고, 누가 결혼한다는 소식들. 어쩌면 성균관이 진정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차례상의 형식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들이 아닐까.

예의 본질은 규칙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 마음이 어떤 형태로 표현되든,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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