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박수근, 나목 전시회, ‘창신동’]
1965년, 열 살 소년의 서울행
1965년 봄, 국민학교 3학년이던 나는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시골 마을을 떠나 서울로 간다는 것, 그것도 ‘유학’을 간다는 말에 온 동네가 부러워했다. 사실 유학이라기보다는 자취생활에 가까웠지만, 그때 우리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한 학기 전 서울로 이사 간 반 친구 영숙이가 떠나던 날이 생생하다. 그 애는 서울 간다고 으쓱거리며 새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밤 이불속에서 ‘나도 언젠가는 꼭 서울에 가겠어’라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만에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차 안에서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쥐며 몇 번이고 당부하셨다.
“형님들 말씀 잘 듣고, 밥 굶지 말고, 편지 꼭 쓰고…”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본 나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창밖만 내다봤다. 남자가 되려면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열 살 소년의 철없는 자존심이었다.
창신동 산꼭대기의 판잣집
서울역에 내려 창신동까지 가는 길은 마치 미로 같았다. 신아일보 기자인 큰 형님과 고등학생인 작은형이 나를 맞이했다. 큰 형님은 검은 뿔테 안경에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고, 작은형은 검게 물들인 군복 상의를 입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다.”
형님이 가리킨 곳은 산꼭대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 중 하나였다. 좁은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니 숨이 찼다. 집은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방 하나에 부엌이라고 해봐야 작은 아궁이가 전부였다.
그날 저녁, 형님은 내게 첫 번째 임무를 주었다.
“편지 쓸 줄 알지? 어머니께 잘 도착했다고 편지부터 써라.”
나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전상서…” 형님이 가르쳐준 대로 시작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위에 계신 분께 올립니다’라는 뜻이었다.
편지를 쓰면서 벌써 어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서울은 참 좋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썼다.
창신국민학교와 형들의 세계
창신국민학교는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였다. 한 반에 70명이 넘는 학생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고, 학생 수가 만 명이 넘어 오전반, 오후반으로도 모자라 3부제로 운영됐다. 어느 날 형님이 신문 한 조각을 보여주며 말했다.
“봐라, 동양 최대 국민학교래. 대단한 데 다니는 거야.”
나는 그게 자랑스러운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어깨가 으쓱했다.
하지만 학교생활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형들과 보낸 시간들이다. 큰 형님은 밤늦도록 원고를 쓰셨고, 작은형은 친구들과 어울려 화투를 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세계에 스며들었다.
“이리 와봐. 화투 할 줄 알아야 어른 대접받는 거야.”
작은형이 화투를 가르쳐줬다. 고스톱, 섯다, 육백… 국민학교 3학년 치고는 제법 고수가 되어갔다. 최희준의 “인생은 나그넷길”이라는 노래도 그때 배웠다. 형이 기타를 치면서 부르면, 나도 따라 불렀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가사의 의미도 모르면서 흥얼거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묘하게 그때 내 처지와 맞아떨어진다.
작은형의 여자친구도 가끔 놀러 왔다. 단발머리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예쁜 누나였다.
“야, 이게 내 동생이야. 귀엽지?”
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탕을 주곤 했다. 형이 없을 때 누나와 둘이서 딱지치기도 하고 술래잡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아마 그 누나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마법 같은 동대문의 밤
창신동 생활이 힘들고 외로웠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큰 위안이 있었다. 바로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동대문의 야경이었다.
해가 지면 나는 집 앞 좁은 공터에 나가 앉았다. 멀리 동대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처음에는 어둠뿐이다가,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마법처럼 세상이 환해졌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온갖 색깔의 네온사인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한쪽에서부터 차례로 불이 들어왔다가 꺼지고, 어떤 것은 글자가 하나씩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대한극장’, ‘평화시장’, ‘미도파백화점’…
읽을 수 있는 글자도 있었고, 너무 멀어서 읽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찬란한 빛의 향연이 내게는 그 어떤 놀이터보다 재미있었다.
어느 날 밤, 작은형이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재미있어?”
“응. 엄청 신기해.”
“저게 다 전기야. 전기로 불을 켜는 거지.”
“전기가 뭐야?”
“음…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냥 마법 같은 거라고 생각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마법 같았다. 시골에서는 호롱불이나 양초를 켜고 살았는데, 서울에는 이런 마법 같은 불빛이 있다니.
어떤 날은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 자러 들어가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몇 시간이고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봤다. 추운 겨울날에도 밖에 나가 앉아서 봤다. 형들이 미쳤다고 했지만,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물 길어 나르는 고된 일상
하지만 서울 생활이 모두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야, 일어나! 물 길어야지!”
아침이면 작은형이 나를 깨웠다. 산꼭대기라 수도가 없어서, 산 중턱의 공동 수돗가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처음에는 형들이 직접 물을 길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자 형들은 꾀를 냈다.
“네가 먼저 가서 줄 서 있어. 우리는 네 차례 되면 갈게.”
그렇게 나는 매일 아침 양손에 빈 양동이를 들고 수돗가로 향했다. 수돗가에는 벌써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어떤 날은 열 명이 넘게 줄을 섰다.
“꼬마, 혼자 왔어?”
동네 아주머니들이 물었다.
“네… 형들이 곧 와요.”
“참 기특하네.”
하지만 기특한 게 아니라 억울했다. 시골에서는 이런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집에 우물이 있었고, 어머니가 다 해주셨다.
한겨울 어느 날은 특히 힘들었다. 새벽부터 눈이 내렸고, 수돗가 앞은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양동이를 붙잡고 서 있었다. 코끝이 시렸고, 발가락이 꽁꽁 얼었다.
“야, 왔다!”
한참 만에 형들이 나타났다. 그때는 형들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물을 받아서 함께 산을 올라가며 형이 한마디 했다.
“고생했다. 오늘 저녁에 만두 사줄게.”
그 말 한마디에 기분이 풀렸다. 순진한 열 살이었다.
김치와 간장, 그리고 계란 프라이의 유혹
먹는 것도 큰 문제였다. 시골에서는 아침마다 뜨끈한 밥에 날계란을 올려 간장과 참기름에 비벼 먹었다. 도시락에는 계란 프라이가 올라가 있었고, 장조림 같은 반찬도 있었다.
하지만 창신동에서의 식사는 달랐다.
“밥 먹자.”
형님이 상을 차렸다. 밥, 김치, 김, 간장. 그게 전부였다.
“이게 다예요?”
“왜, 많잖아. 먹어.”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다. 하지만 배가 고프니 먹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 지나니 익숙해졌다.
문제는 월말이었다. 생활비가 떨어져 갈 무렵이면 김마저 사라졌다. 김치와 간장만으로 밥을 먹어야 했다.
학교 점심시간은 더 비참했다. 내 도시락에는 밥과 맥심 커피 병에 담아 온 김치가 전부였다. 친구들 도시락을 슬쩍 보면, 밥 위에 노란 계란 프라이가 올려져 있었다. 어떤 친구는 어묵볶음, 어떤 친구는 멸치볶음이 있었다.
“야, 나 좀 줘.”
용기를 내서 친구에게 말했다.
“뭘?”
“그거… 어묵 하나만.”
“어? 그래, 먹어.”
친구가 흔쾌히 나눠줬다. 그 어묵 한 조각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뻔뻔해졌고, 매일 친구들 반찬을 얻어먹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너희 집이 어려우니?”
“아니요!”
나는 펄쩍 뛰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럼 도시락 반찬을 왜…?”
“형들이… 요리를 못해요.”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국 이 소식이 어머니 귀에 들어갔다. 며칠 후 시골에서 커다란 보따리가 도착했다. 장조림, 멸치볶음, 김, 고추장, 된장… 온갖 반찬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보내셨다. 잘 먹어라.”
큰 형님이 말했다. 나는 그날 밤 편지지를 꺼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잘 먹고 있어요. 반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눈물이 나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큰 형님에게 불평하셨다고 한다.
“애를 그렇게 굶기다니! 생활비는 넉넉히 보냈잖아요!”
큰 형님은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끝내 모르겠다. 아마 책을 샀거나, 다른 데 썼을 것이다.
짜장면과 고춧가루 도둑질
그래도 가끔은 좋은 날도 있었다.
“오늘 중국집 가자.”
큰 형님이 말했다. 아마 월급을 받았거나, 원고료를 받은 날이었을 것이다.
동네 중국집은 좁고 허름했다. 하지만 내게는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짜장면 세 개요!”
형님이 주문했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짜장면이 나왔다. 나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입 주변이 온통 검게 물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작은형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더니, 테이블 위의 고춧가루 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군복 주머니에 쏟아부었다. 단무지도 몇 조각 집어넣었다.
“형, 그거…”
“쉿!”
형이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재미있었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왠지 신났다.
집에 돌아온 후 형은 주머니에서 고춧가루와 단무지를 꺼냈다.
“자, 이제 한동안 고춧가루 안 사도 되겠다.”
그때는 그저 웃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살림이 빠듯했으면 그랬을까. 고춧가루 하나도 아껴야 했던 그 시절.
전차 속의 지식인
큰 형님은 내게 완벽한 롤모델이었다. 신아일보 기자라는 직업도 멋있었지만, 형님의 모든 행동이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였다.
가끔 형님은 나를 광화문까지 데려갔다.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땡그랑땡그랑!
전차 종이 울리며 출발했다. 흔들거리는 전차 안에서 형님은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문고판 책을 들고 읽었다.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형님은 집중했다.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 우아해 보였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나는 형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책을 읽는 어른. 그게 바로 진짜 지식인이라고 믿었다.
원고지를 찢어가는 소리
형님은 집에만 있으면 글을 썼다. 소설을 쓴다고 했다.
방 한쪽에는 원고지가 쌓여 있었다. 내 키만큼, 아니 그보다 더 높이 쌓여 있었다.
형님은 펜에 파란 잉크를 찍어 원고지에 글을 써 내려갔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마치 원고지를 찢어가듯 빠르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가 좋았다.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님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곤 했다.
“형님, 뭐 쓰는 거예요?”
“소설.”
“무슨 내용이에요?”
“넌 아직 몰라. 크면 알게 돼.”
신비로웠다. 그 원고지에 담긴 이야기가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큰 소주병에 담긴 파란 잉크를 작은 병에 딸아 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과학자가 실험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정확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그 소리는 내 귓속에 깊이 새겨졌다. 나중에 내가 글을 쓰게 된 것도, 아마 그때 그 소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원고지만 보면 형님의 그 소리가 들리곤 했다.
공평한 매질
고등학생인 작은형은 나와 직접적인 간섭은 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큰 형님에게 의탁된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형의 동생이 서울에 놀러 왔다. 나와 동갑이었다.
처음에는 잘 놀았다. 딱지치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했다. 그런데 사소한 일로 다툼이 시작됐다.
“내가 이겼어!”
“아니야, 내가 이겼어!”
“거짓말하지 마!”
“너야말로 거짓말쟁이!”
결국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우리는 뒹굴며 싸웠다.
“야, 이 새끼들아!”
작은형이 뛰어나왔다. 우리 둘을 떼어놓고 벽에 세웠다.
“너희 둘 다 똑같이 맞을 거야.”
형은 막대기를 들었다. 그리고 동생부터 때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아야! 형! 저 얘가 먼저…”
“닥쳐!”
탁! 탁! 탁!
동생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탁! 탁! 탁!
“으악! 아파요!”
“싸우지 마!”
탁! 탁! 탁!
나도 울었다. 아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형이 자기 동생을 더 때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세게 때렸다.
나중에 형의 동생이 울면서 물었다.
“형, 왜 나를 더 때려?”
“당연하지. 넌 내 동생이잖아. 손님한테 먼저 잘해야지.”
그 말을 듣고 나는 형을 다시 보게 됐다. 공평했다. 아니, 오히려 나를 더 챙겨줬다.
그날 밤, 형은 우리에게 만두를 사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만두. 우리는 아픈 것도 잊고 맛있게 먹었다.
아현동으로의 이사
창신동에서 1년쯤 살았을까. 어느 날 큰 형님이 말했다.
“이사 가기로 했다. 아현동으로.”
“아현동이 어디예요?”
“마포 쪽이야. 여기보다 좀 낫지.”
이사 날, 우리는 보따리를 쌌다. 큰 보자기에 이불, 옷, 책, 그릇들을 싸서 등에 메고 산을 내려갔다.
동대문에서 마포 가는 전차를 탔다. 짐이 많아서 몇 번을 왕복해야 했다.
땡그랑땡그랑!
전차는 흔들거리며 달렸다.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서울 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창신동이여, 안녕.’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산꼭대기에서 보던 네온사인, 물 길러 다니던 수돗가, 중국집 아저씨… 모두 안녕
하지만 힘들다기보다는 신났다.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설렘이 컸다.
아현동 집은 창신동보다 훨씬 나았다. 산 위가 아니라 평지에 있었고, 판잣집이 아니라 제대로 된 한옥이었다.
“와, 여기 좋다!”
마당도 있고, 방도 두 개나 됐다. 나는 마당을 뛰어다니며 좋아했다.
“아현국민학교에 다니게 될 거야.”
새 학교, 새 친구들. 모든 게 기대됐다.
동양 최대 콩나물시루에서 수영장이 있는 학교로
아현국민학교는 창신국민학교와는 달랐다. 학생 수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운동장 구석에 큰 수영장이 있었다.
“와! 수영장이다!”
처음 본 날, 나는 입을 벌린 채 수영장을 바라봤다. 파란 물이 햇빛에 반짝였다.
여름이 되자 수영 수업이 시작됐다.
“물이 무서운 사람?”
선생님이 물었다.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시골에서 개울에서 놀았으니까.
하지만 막상 들어가니 깊었다. 발이 닿지 않았다.
“으악!”
허우적거리는 나를 선생님이 건졌다.
“넌 얕은 데서부터 해.”
창피했다. 하지만 매일 연습했다. 한 달쯤 지나자 제법 헤엄칠 수 있게 됐다.
숭문사까지의 긴 여정
“오늘 숭문사 간다.”
큰 형님이 말했다.
“숭문사가 뭐예요?”
“서점이야. 광화문에 있어.”
“전차 타고 가요?”
“아니, 걸어간다.”
“네?!”
걸어서 광화문까지? 그게 얼마나 먼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아현동을 출발해 서대문을 지나고, 광화문까지. 끝없이 걸었다. 다리가 아팠지만 투정하지 않았다. 형님들이 나를 데려간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숭문사는 생각보다 작은 서점이었다. 하지만 책이 가득했다. 벽면 전체가 책이었다.
“여기요. 국어 교과서 있어요?”
나는 잃어버린 교과서를 샀다. 형님은 문고판 책 몇 권을 샀다.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책들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더 멀게 느껴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다리 아프지?”
큰 형님이 물었다.
“아니요.”
거짓말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그대로 쓰러져 잤다.
영화 초대권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일요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오늘 영화 보러 간다.”
큰 형님은 기자라서 영화 초대권을 자주 받았다.
서대문 사거리 근처의 영화관. 그곳은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영화가 시작되면,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빠져들었다. 서부영화, 전쟁영화, 멜로영화… 무엇이든 좋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 형님이 물었다.
“재미있었어?”
“네! 엄청 재미있었어요!”
“그래, 다행이다.”
어떤 날은 영화를 보고 나서 중국집에 들렀다.
“만두 줘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만두. 한입 베어 물면 육즙이 흘러나왔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형님, 왜 가끔 중국 음식을 사주세요?”
“응? 그냥… 네가 고생하니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형님은 집에서 보내준 생활비를 다 쓰고 나면 이렇게 공짜 영화 초대권으로 나를 달랬던 것이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만두를 사주셨다.
연탄공장
집 골목을 나서면 바로 코앞에 조그만 연탄공장이 있었다. 처음 이사 온 날, 나는 그 앞을 지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뭐 하는 곳이지?”
궁금증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꼬마, 위험해. 물러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아저씨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는 커다란 동그란 통이 있었다. 쇠로 만든 것 같았다. 그 통 위에는 기다란 쇠막대기 여러 개가 달려 있었다.
“저게 뭐예요?”
“연탄 만드는 거야.”
아저씨가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쇠막대기들이 일제히 내려가며 통 속으로 쑥 들어갔다.
꾹!
둔탁한 소리와 함께 뭔가 찍어냈다. 쇠막대기가 다시 올라가자, 통 아래로 까만 연탄이 떨어졌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동그란 구멍이 스무 개쯤 뚫린 완벽한 연탄이었다. 방금 전까지 가루였던 것이 순식간에 단단한 연탄으로 변한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연탄공장 단골 구경꾼이 됐다.
학교 가는 길, 나는 항상 연탄공장 앞에 멈춰 섰다.
백구두 할아버지의 등장
아현동에서 살 때, 외할머니가 오셔서 나를 돌봐주셨다. 형들과의 자취생활이 끝나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된 것이다.
할머니와 사는 것은 훨씬 편했다.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빨래도 깨끗했다.
그런데 가끔 신기한 손님이 오셨다.
“얘야, 인사드려라. 할아버지시다.”
“안녕하세요.”
그분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이셨다. 하얀 양복에 백구두를 신은, 훤칠하고 잘생긴 분이었다.
“오, 잘 자랐구나.”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손이 부드러웠다.
할아버지가 오시면 보통 2주 정도 머무셨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음… 다른 집에 가셔.”
“다른 집?”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할아버지는 부인이 세 분이나 계셨다. 본부인 외에 두 분이 더 계셔서, 그분들 집을 돌아가며 사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집에 계시는 동안 책을 많이 읽으셨다. 어떤 날은 삼국지를 읽어주셨다.
“옛날 중국에 조조라는 영웅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비음이 섞여 있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극적으로 읽어주셔서 정말 재미있었다.
“할아버지, 다음은요?”
“내일 읽어주마.”
할아버지는 나를 당인리 근처 한강에도 데려가 주셨다.
“와, 물이 엄청 많다!”
처음 본 한강은 넓고 웅장했다. 시골 개울과는 비교도 안 됐다.
“저기 배 타고 싶어요.”
“그래, 다음에 태워주마.”
하지만 다음은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또 다른 집으로 떠나셨다.
과외선생과 새벽의 공포
국민학교 6학년이 되자 과외공부가 시작됐다. 중학교를 잘 들어가야 명문 고등학교에 가고, 그래야 명문대학에 간다는 논리였다.
“선린고등학교 학생이 올 거야. 열심히 배워라.”
부모님은 큰 투자를 하셨다. 입주 과외선생을 두신 것이다.
과외선생은 각진 얼굴에 눈매가 매서운 청년이었다. 말수가 적었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다.
“열심히 하자.”
그게 첫인사였다.
과외는 지독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이었다.
“일어나.”
과외선생이 나를 깨웠다.
“네?”
“밖에 나가 있어.”
“왜요?”
“정신 차리려면 추운 데 나가 있어야지.”
나는 잠옷 바람으로 밖에 나가야 했다. 좁고 긴 골목 끝, 우리 집 대문 앞. 캄캄했다.
“선생님… 추워요.”
“공부 열심히 할 거야?”
“네, 할게요!”
“그럼 들어와.”
벌벌 떨며 들어간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정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름방학 때는 과외선생 집에 따라간 적이 있다. 충청도 웅천이었다.
집은 작고 허름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머슴 할아버지가 계셨다.
“저분은요?”
“우리 집에서 일하시는 분이야.”
과외선생 집안은 쇠락했지만, 아직 옛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차 타고 남산까지
중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는 남산 위에 있었다.
“아현동에서 남대문까지 전차 타고, 거기서 남산도서관까지 올라가. 그다음 계단 내려가면 학교야.”
복잡한 통학로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전차 요금이 편도 2원 50전. 왕복 5원이었다. 당시에는 큰돈이었다.
땡그랑땡그랑!
전차는 덜컹거리며 달렸다. 나는 창밖을 보며 서울 거리를 구경했다.
하지만 진짜 즐거움은 하굣길에 있었다.
남대문 시장의 유혹
“오늘도 사 먹을까?”
하교 시간, 나는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활기찼다. 온갖 물건을 파는 사람들, 흥정하는 소리, 음식 냄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가오리 파는 아주머니 가게였다.
“야, 학생! 가오리 사가!”
퉁퉁한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나는 사지 않았다. 돈이 없었다. 하지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아주머니의 손놀림은 신기했다. 가오리를 쥐고 칼로 슥슥 벗기면, 순식간에 깨끗한 살만 남았다.
“어떻게 저렇게 빨라?”
한참을 넋 놓고 바라봤다.
배가 고프면 순대와 멍게를 샀다.
“순대 한 줄, 멍게 하나요!”
따끈한 순대에 소금 찍어 먹으면 꿀맛이었다. 멍게는 싱싱하고 달콤했다.
‘이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지.’
그때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쌍문동으로, 그리고 이별
고등학교 입시에서 1차를 떨어졌다. 재수를 해야 했다.
“쌍문동에 아버지 친구분이 계신다. 거기 가서 하숙하면서 공부해라.”
또 이사였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이별의 날,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잘 먹고, 공부 열심히 하거라.”
“네, 할머니.”
“편지 자주 써라.”
“네.”
할머니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도 목이 메었지만 참았다.
보따리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돌아보니 할머니가 대문 앞에 서 계셨다.
‘안녕, 아현동. 안녕, 내 소년 시절.’
5년간 살았던 아현동을 떠났다. 연탄공장, 전차, 남대문 시장, 순대와 멍게, 만두 팔던 중국집, 백구두 할아버지…
모든 것이 추억이 되어 가슴속에 남았다.
에필로그: 기억 속에 살아있는 그들
지금도 가끔 동대문 근처를 지난다. 그럴 때면 창신동 산 위를 올려다본다.
판잣집은 다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내가 서서 네온사인을 바라보던 그 자리는 어디쯤일까?
아현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도 있다. 학교는 그대로 있다. 하지만 내가 살던 동네는 재개발로 완전히 변했다. 연탄공장이 있던 곳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괜찮다.
기억 속에서는 모든 것이 생생하다.
찬란하게 빛나던 동대문의 네온사인.
원고지에 글을 쓰시던 큰 형님의 사각사각 소리.
전차 안에서 책을 읽던 형님의 우아한 모습.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백구두를 신고 삼국지를 읽어주시던 할아버지.
순대와 멍게의 그 맛.
모두 내 안에 살아있다.
그때 그 소년은 어른이 되어, 평생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도 창신동 판잣집에서 형님이 쓰시던 그 사각사각 소리가 내 운명을 정했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정말 나그넷길이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그 길 위의 모든 순간이 나를 만들었다.
창신동, 아현동,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