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 상류 지천인 반구천의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너비 약 8m, 높이 약 4.5m 크기의 바위 면에 여러 그림이 새겨져 있다.
특히 50마리가 넘는 고래가 새겨져 있다. 가슴지느러미가 긴 혹등고래, 새끼를 업고 다니는 귀신고래, 두 갈래로 물을 뿜어내는 북방 긴 수염 고래, 향고래 등 어떤 고래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고래가 잘 새겨져 있다. 또한 수면 위를 뛰어오르는 고래, 수면 밖에서 물을 뿜는 고래, 새끼와 함께 유영하는 고래 등 고래의 생활상도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고래를 잡는 모습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배에서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는 모습, 배를 타고 고래잡이 하러 가는 사람들도 묘사해 두었다.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에서 고래잡이가 신석기시대나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고래 사냥을 가장 큰 수확이었을 것이다. 고래는 크기가 매우 커서 한 마리만 잡아도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래를 잡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인 데다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래잡이 배라고 해야 5명에서 10명 정도 타는 큰 뗏목 수준에 불과했을 것이고 작살은 사슴뼈로 그리고 그물은 질긴 나무 속대를 가지고 엮었을 정도였을 것이다. 맨 앞에 경험 많은 사람이 고래를 발견하면 작살을 들고뛰어내리며 고래 급소에 작살을 꽂았을 것이다.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바다로 나가서도 매번 고래를 잡아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파도가 심해지면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고래에 뗏목이 뒤집히기도 하여 목숨을 잃는 위험한 일도 자주 겪었을 것이다.
경험 많은 아재는 잡아온 고래의 모양과 특성을 잘 기억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렵게 잡아온 고래의 모습을 조상들이 그려 놓은 암각화 칠판에 또 그려 넣었을 것이다. 이 아재는 청년들을 암각화 앞에 앉혀놓고 지난번 고래잡이에서 위험했던 상황을 설명하고 또한 새로운 고래를 잡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조상들에게 배운 대로 고래를 잡지만 이와 같은 고래잡이를 기록해 놓은 것은 후대에게 그 위험과 사냥의 지식을 교육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 앞바다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울산은 예로부터 고래잡이로 유명한 곳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면 선사시대로부터 위험한 고래잡이를 한 것은 해양을 극복하고 정복하는 일이기도 했으리라. 울산 앞바다 조선소에서 매일 1척 이상의 초대형선박이 만들어전 세계 해양을 누비게 하는 힘의 원천도 이러한 해양 진출 정복의 DNA가 우리들 능력의 밑바탕에 깔려 있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