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베르겐에 도착한 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연간 270일 이상 비가 온다는 도시이니, 비를 만난 것이 불운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베르겐의 날씨는 그냥 그런 것이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항구에 붙어있는 호텔방 덕분에 창문을 열면 베르겐 항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노르웨이에서 오슬로 다음으로 큰 도시이자 최대 항만도시.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부산과 비슷한 곳을 상상했다. 그러나 베르겐의 항구는 달랐다. 컨테이너 부두와 화물선은 도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고, 도심과 맞닿은 항구에는 크루즈선과 여객선, 흰색 레저보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선미가 하늘로 솟아오른 오래된 범선 한 척이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15만 톤은 되어 보이는 크루즈선과 목조 범선이 나란히 물 위에 떠 있는 풍경은, 시간의 층위가 한꺼번에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항구 주변의 집들은 원색이었다. 흰색, 벽돌색, 빨강, 노랑. 삼각형 지붕과 창문이 많은 노르웨이 전통 가옥들이 항구를 따라 늘어서 있었고, 그 집들은 산 위에도 곳곳에 박혀 있었다. 우리나라 울릉도도 산 위에 집을 짓지만, 울릉도의 집이 생활을 위한 것이라면 이곳의 집은 마치 전시를 위해 지은 것 같았다. 못생긴 집이 하나도 없었다.
길바닥의 네모난 돌 하나에도 정성이 배어 있었다. 집마다 칠해진 색깔이 오래됐어도 흐트러짐 없이 관리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노르웨이에서는 건축 허가를 받을 때 미관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한다고 했다. 주변 경관과 어울려야 하고, 전통 양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는 거리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네 어촌과 포구를 생각했다. 자원은 충분한데 정성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정성을 들일 구조가 없는 것인지. 베르겐의 골목을 걸으며 그런 생각이 자꾸 따라왔다.
비를 맞으며 항구를 걷다가 카페 하나로 들어섰다. 벽면과 천장이 오래된 배의 목재로 마감된 곳이었다.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고, 세월의 냄새가 커피 향과 섞여 있었다. 카페 옆 목조건물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는데, 그 옆 건물이 받치고 있는 형태로 수백 년을 버텨온 것이었다. 두 건물 사이 골목으로 들어가니 바닥도 나무, 양쪽 벽도 나무인 길이 나왔다.
이곳의 집들은 중세 한자동맹 시대의 목조 건물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었다. 14세기부터 북유럽 상업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독일 상인들은 대구와 청어를 거래하며 부를 쌓았다. 건물 꼭대기에는 도르래가 달린 망루가 있었다. 짐을 들어 올리던 장치였다. 그 도르래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달려 있었다. 원색으로 칠해진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서 골목을 이루는 그 구조는, 관광지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그냥 세월이 그대로 남은 것이었다.
골목 안쪽에서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대구 목각이 눈에 들어왔다. 말린 대구의 형태를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이었다. 한때 이 바다에서 잡힌 대구가 베르겐 경제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그 목각이 말없이 전하고 있었다. 뱃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진 나무 벽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수백 년의 시간이 손끝에 닿는 것 같았다.
항구 옆 어시장으로 발걸음이 이어졌다. 게, 랍스터, 연어, 새우, 홍합, 참치. 파는 곳도 있고 그 자리에서 조리해 주는 곳도 있었다. 부산 자갈치 시장과 비교하면 한 코너 정도의 규모였지만, 사람들로 가득했다. 젊은이들이 종이컵에 담긴 새우를 손으로 집어 먹으며 웃고 있었다. 비가 와도, 그늘 하나 없는 야외였어도, 그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 틈에 끼어 맥주 한 잔과 해산물을 시켰다. 베르겐의 비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항구 너머로 잠깐 파란 하늘이 열리더니 산 위의 집들 위로 무지개가 떴다. 빨강 지붕, 노란 벽, 흰 범선, 그 위로 걸린 무지개. 연출된 것이 아닌데 연출된 것보다 완벽했다.
여행작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 장소가 우리 내면의 어떤 필요에 응답하기 때문이라고. 베르겐이 아름다운 것은 단순히 경치가 좋아서가 아닐 것이다. 이 도시는 오래된 것을 허물지 않고 받쳐가며 살아왔다. 기울어진 건물을 옆 건물이 받치고, 수백 년 된 나무 골목을 카페와 상점으로 채우고, 대구를 잡던 도르래를 지금도 그 자리에 두었다. 새것으로 교체하지 않고 오래된 것과 함께 사는 방식이, 이 도시에 시간의 두께를 만들었다.
부산을 다시 생각했다. 영도의 안벽, 자갈치 시장, 오래된 포구들. 베르겐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베르겐이 보여주는 것은 가능성이다. 오래된 것을 정성껏 가꾸면, 그것이 도시의 품격이 된다는 것.
비는 계속 내렸다. 맥주잔을 내려놓고 다시 골목으로 들어섰다. 반질반질한 나무 벽을 다시 한번 손으로 짚으며, 이 도시가 수백 년 동안 지켜온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