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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Jul 03. 2020

그 사람이 위인이라서 위인전을 읽는 것이 아니다.

위인전을 읽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노래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이 100명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여기에 나오는 100명도 다 제대로 모르는구나 싶은 건 나만 그런 걸까?

혹시 여러분은 여기에 나오는 위인이 100명이 아닌 건 알고 있는가?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위인들 거의 모두 위인전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


첫째가 다니던 유치원은 할로윈데이 행사 대신 위인 데이 행사를 했다. 위인 데이에는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존경하는 위인을 골라 코스프레를 하는 날이다.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신사임당, 논개 등을 많이 한다. 특이하게도 우리 아이는 박혁거세를 했지만 말이다. (알을 만들어서 들고 갔었다.ㅋㅋㅋ)


유치원에서 받아온 위인전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거실 책꽂이 한쪽에는 계몽사(지금도 있나?)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이 촤르륵 꽂혀 있었고 그 옆에는 출판사가 기억나지 않는 위인전집이 촤르륵 꽂혀 있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집 안에 위인전집 한 번쯤 들여놓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는 위인전이 정말 재미가 없었다.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각자의 업적을 빛내는 이야기. 다들 어릴 적부터 특출함을 보였고 타의 모범이 되었다는 사람들. 나랑은 정말 상관없을 것 같은 대단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이름만 바꿔도 될 것 같은 비슷한 위인들의 느낌에 위인전은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마흔이 넘어 <니체의 삶>을 읽는 이제야 사람들이 왜 위인전을 읽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된다. 우리는 그 사람이 위인이라서 위인전을 읽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기 위해 전기를 읽는 것이다. 누군가의 전기를 읽는다는 것은 살다가 어떤 순간을 맞이했을 때(그 순간이 힘든 순간일 수도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나의 최선이 맞닿을 수 있는 그 어느 곳을 미리 그려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얻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여러 가지 이유를 짐작은 해보지만) 위경련에 꽤나 고생을 했다. 몇 시간을 짐승처럼 기어 다녔고 아직도 후유증으로 20% 모자란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온몸이 맞은 듯이 욱신거린다. 기운이 하나도 없고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안 먹으면 너무 배가 고프다. 고작 몇 시간의 위경련에 몸이 만신창이가 된 느낌이다. 

이 와중에도 일과를 정리하고 가족들과 잠자리에 들어가기 직전 20분을 책을 읽는다. 오전 시간 틈틈이 글을 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왜 이러는 걸까?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던 안중근 의사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비슷한 느낌이다. 매일 읽고 쓰는 삶을 놓아버리고 나면 '내'가 없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책을 펼쳐두고 두통이 조금 잦아드는 때에 십 분이라도 읽으려 노력한다. 글쓰기 위해 긴 시간 앉아있기 부담스러우니 한 단락을 쓰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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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보면서(요즘 책의 표지만 바라보는 때가 많다) '왜 얼굴의 일부만 흑백으로 살려두고 빨갛게 칠했을까?' 궁금했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쏙 드는 빨강이라 그냥 다 빨간색 표지로 해도 되었을 테고, 흑백 사진 전체를 살려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니체의 눈이 초점이 맞지 않는다. 평생을 지독한 근시로 고생했다 결국 실명하고 말았다던 구절을 떠올려보면 양쪽 눈이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어쩌면 아트로핀(안약)을 처방받은 후 아예 초점을 맞출 수 없을 때의 사진 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언뜻 보면 표지의 사진으로는 니체의 눈이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는 출판사의 배려가 아닐까 싶었다. 감추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호하고 싶은 마음. 이렇게 남겨진 사진으로도 상처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표지는 아닐까? 역시 모든 것은 꿈보다 해석이다.


니체는 지독한 근시, 구토, 두통 등을 달고 살면서 끊임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는 병이 깊어지자 동생을 불러 병간호를 부탁하고 오랜 친구가 자료를 읽어주면 필요한 부분을 머릿속으로 기억하는 식으로 책을 읽었다. 고통이 극심한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긴 문장을 쓸 수 없었던 니체는 잠언식의 문체를 사용해서 생각을 적어 낸다. 니체 특유의 문장이 탄생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Photo by Prasanna Kumar on Unsplash



아마 예전 같았으면 이런 '위인'의 이야기를 읽고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니체도 이렇게 살았으니 건강한 너희는 감사히 여기고 책 읽으라는 거야 뭐야.' 이랬을지도 모르겠다.(쓰고 보니 참 못났다.) 위인전을 읽던 어린 시절의 내 마음도 비슷했다. '어릴 적부터 공부 열심히 하고, 효심이 깊어야 하고, 타인을 배려해야 하고 등등... 하면 위인이 된다는 거네? 싫은데? 힘든데?' 가령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실제로 몸이 힘든 가운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생기면서 니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바뀌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누군가 읽어주지 않고, 생각을 토해내지 않는 순간이 곧 죽음이라고 여긴 것은 아닐까? 후대에 대단한 위인으로 남겠다는 목표지향적 행동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쥐어짠 행위를 했을 뿐. 살아있음을 느끼는 최고의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용으로 만들어진 위인전이건 어른들이 읽는 자서전 형태의 위인전이건 접근방법도 내용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의 전기를 읽으면 그 사람의 위대한 업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가 어떤 고난을 이겨냈는지에 초점을 맞춰 읽는다. 그리고 덮으면서 '우와 이 사람이 정말 대단하네.' 하고 나면 끝이다. 과연 위인전이나 전기가 그런 목적으로 읽히는 게 맞는지 처음으로 의심이 든다.


누군가의 일생을 접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나와 그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방식을 누군가가 먼저 살았던 흔적을 찾으면서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는 과정이 전기를 읽는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머리가 아픈데도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눈치 아닌 눈치를 본다. 더 아프면 이것도 못할 것 같아 불안한 마음도 들고, 더 하고 싶지만 몸이 언제 빨간불을 켤지 몰라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있다. 니체의 삶에서 위안을 얻는 것은 그 보다 내가 건강해서가 아니다.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새롭게 니체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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