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갈 사랑해도 될까
퇴근길,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돌아온 봄에도 여전히 똑같은 퇴근길. 새해를 맞이하고 변화하는 환경 따위야 아무런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일상. 정해진 틀을 벗어나고 싶어서 매일 지옥철이라 불리는 퇴근시간의 지하철을 피하고 3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걷기로 했다.
이것도 색다르고 괜찮다는 생각에 옮긴 발걸음이 5분도 안되어서 후회로 물들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빨리 집에 가서 집안일을 한 뒤 편안히 누워서 쉬어도 모자랄 판에 꾸역꾸역 걸어서 가려니 괜히 더 멀게 느껴진다. 여전히 급하게 뛰어가는 차들과 우르르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신호에 맞춰서 잘 짜인 시스템처럼 움직인다.
모든 도시가 멈춰있는 기분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고 그냥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그렇게 흘러가기만 한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미치도록 제자리걸음이다. 그렇게 많은 것이 변해봤자 결국 나는 변하지 못했다.
그렇게 걷다가 집 주변에 다 와가면서 점점 사람들이 안 보이기 시작한다. 20분 넘게 혼자서 외로이 핸드폰도 보지 않고 노래도 듣지 않고 그냥 걷기만 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걸으니 어느 순간 내가 서 있는 곳이, 지금의 내가 가는 곳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혼란스럽다.
나는 너무 안정적이다. 근데 그래서 위태롭다. 매일같이 모순 위에서 산다. 그래, 잘 살고 있다. 근데 잘 못 살고 있단다. 그게 또 맞는 말 같다. 다섯 살배기 아이의 삶이 부러워진다. 단순히 예와 아니오로 나뉘던 시절이 그립다.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와 아니오 뿐인데,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거에 YES를 들었다면 저거엔 들면 안 되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그냥 나도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같이 말할 순 없는 건가.
시간은 있으나 여유는 없다. 따뜻한 공기가 갑작스레 빠지고 천천히 시원하고도 찬바람이 세상을 덮을 때쯤 느껴진다. 변화가 필요하다. 나의 삶을 당장에 변화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어떤 것과 지독한 사랑에 한 번 빠져보고 싶다. 지금이 되도록 좋아하는 것 하나, 취미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그냥저냥 살았다.
이제는 나도 그 어떤 것에 미쳐서 사랑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