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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탓하기

수채 물감과 친해지기

고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초보는 연장 탓을 해야 합니다.

제가 수채화를 싫어하게 된 것은 아마도 질이 낮은 그림 재료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미술 수업 시간에 쓰던 얇은 스케치북과 포스터물감이 생각납니다. 같은 재료로도 잘 그리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예민하던 저는 물 칠을 조금만 해도 울고 벗겨지던 종이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멀어졌던 수채화에 대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좋은 연장을 만나고 나서입니다. 200g 두께의 수채화용 종이와 고체 물감을 써 보고 친구에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다른 취미 생활이 없더라도 이 종이에 색칠을 하고 좋아하는 시를 쓰면서 살아도 행복하다고 느낄 것 같다고 말입니다.


“딸이 일곱 살쯤 됐을 때 내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대학에서 사람들에게 그림 그리는 걸 가르친다고 했더니 아이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럼 그 사람들은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잊어버렸단 말이야?’”-하워드 이케모토

창작 면허 프로젝트/ 대니그레고리 23p


정말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잊어버렸습니다. 아니 그림을 그려 봤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보고 창작 욕구가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화려한 칼라, 다양한 표현, 너무나 자유롭게 그려 놓은 그림들을 보며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니 그레고리가 제시하는 방법으로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난 별로 재능이 없나 봐’ 하면서 노트를 덮었습니다. 그림의 씨앗을 싹 틔우기엔 너무 땅 깊이 묻어 놓았었나 봅니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얇은 스케치북과 질 안 좋은 물감으로 수채화를 그리면 조금만 붓질을 해도 울룩불룩 해지는 종이를 보고 같이 울고 싶었습니다. 섞을수록 색깔이 탁해지는 물감을 보며 수채화란 참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채화를 그리는 친구들이 신기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선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내가 그림을 그려본 건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잊어버렸습니다.

수채물감의 색이 정말 예쁘구나 하고 느꼈던 건 200g 두께의(보통 책은 80g) 스케치북과 노랑이 예뻐서 유명한 시넬리에 고체 물감을 사서 그냥 아무렇게나 스케치북에 칠하고 나서였습니다. 색깔만 봐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수채화가 어려웠던 건 반은 재료 탓이었던 겁니다. 물론 적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매일 그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만 먼저 좋은 재료를 써 보는 것도 그림 그리기 의욕을 살리는 좋은 방법입니다. ‘창작 면허 프로젝트’를 보고 잠깐 충만했다가 사그라들었던 그림에 대한 의욕은 다행히 3년 만에 비싼(제 그림 수준에) 재료를 만나서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문구점 차릴 거냐고 가끔 구박해도 그림은 장비빨이라며 꿋꿋이 하나씩 사고 있습니다. 만약 ‘매일 그리기 프로젝트’ 1000일을 채운다면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신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답했죠. 시넬리에 물감 48색 세트가 받고 싶다고요. 이 글을 슬쩍 남편에게 보여줘야겠습니다.

 


천천히 친해지기

그림 동화책 따라 그리는 것의 장점이 재료와 천천히 친해진다는 것입니다. 동화책 전체를 따라 그리면 같은 재료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비슷한 그림을 여러 번 그리게 됩니다. 동화책 한 권을 따라 그리면 웬만한 재료들은 손과 친해집니다. 그림 초보인 분들이 그림 재료에 익숙해지기 좋은 방법입니다.

수채화는 까다로운 재료입니다. 물 조절을 잘 해야 하고 조색하기도 힘들고 종이에 따라 색깔도 조금씩 다르게 나옵니다. 그래서 수채 물감이 사용하기 어렵다면 수채색연필을 사용하다가 수채 물감으로 넘어가면 좋습니다. 수채색연필은 12색, 24색, 36색등 종류가 많지만 휴대가 편한 12색으로 시작하셔도 됩니다. 12색을 섞어서 색을 만들어 보면 나중에 수채 물감을 조색해서 쓸 때도 도움이 됩니다.

저는 그림 동화책 따라 그리기 네 번째 책(이제 너랑 절교야)과 다섯 번째 책(치과 의사 드소토 선생님)을 수채색연필로 그려 본 것이 나중에 수채화를 그리는 데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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