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위한 땅은 없다
여기도 여혐 저기도 여혐, 혐오가 콸콸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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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었다.
한국에선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천박하게 돈과 쾌락만 좇는 사람들.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갑질과 진상. 기후 위기고 뭐고 알 바 없는 정부와 윗대가리들. 말로만 실천하는 ESG와 SDGs. 나는 사실 ESG라는 말도 극도로 싫어한다. 자연을 인간 입맛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은 주제에 좋은 말인 것처럼 포장한 단어다. 무역이 공정하지 않아 공정무역이라는 이상한 단어가 생겼듯, 기업이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존중하지 않아 ESG라는 어처구니 없는 단어가 생겼다. 원래 이윤보다 생명이 중요한 건 당연한 일이다.
다양성에 대한 배려도 너무나 부족했다. 다르다는 이유로 눈치를 봐야 했다. 획일화. 줄 세우기.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에 물들어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숨이 막혔다. 떠나고 싶었다. 적어도 말이라도 못 알아 듣는다면 덜 답답하겠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거기에 나라가 기름을 부었다. 매일 눈을 뜨면 더는 눈을 뜨지 못하는 여자들이 늘어만 갔다. 타인의 미래를 앗아간 놈들은 뻔뻔히 본인의 미래를 보장해달라 외쳤다. 국가는 그런 놈들에게만 관대했다. 자기들만의 세상이지, 아주. 기가 막혔다. 구역질이 났다. 한국은 인간을 더이상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국가 자본을 생산하는 기계다. 국민은 인격체가 아니라 성기와 인큐베이터로 취급받는다. 혐오 양성국가로서 악명을 떨치겠노라 작정이라도 한 건지. 역시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 나라엔 희망이 없어.
1.
희망이 없는 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떠나야 좋을까. 식생이나 문화, 날씨, 치안 등이 괜찮은 곳을 찾아 보던 중 후보를 몇 군데로 추렸었다. 그러나 환상을 품어 보기도 전부터 환멸나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성별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이렇게 바꿨다 저렇게 바꿨다 할 수 있다는 둥의 뉴스.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 자체가 없다면, 굳이 내 성별을 바꿔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한국보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더 적은 페이 등등. 여성 외노자는 소모품 쓰다 버리듯 한다는 곳도 있었고, 어디에도 여성으로서 안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은 없었다. 결국 지옥을 벗어나 또 다른 지옥으로 가야 하는 건가. 최악이었다.
애초부터 문명이 가부장제를 만나고 계급질서와 식민지배, 노예화 등의 역사를 거쳐 발생한 것이 국가다. 국가는 '존재의 나은 삶'을 보장해주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힘 겨루기를 하자.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물건이 되어 식량을 생산하도록. 이 규칙을 반복하며 탄생한 것이다. 수백만 년 이어져 온 모계제 사회에서는 전쟁도 폭력도 노예도 없었으나 인류가 자연법칙을 거스르고 가부장제를 채택하면서 불행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전 세계가 이 패러다임에 물들어버렸다.
여성을 위한 국가는 없다. 여성을 위한 땅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세계는 강약약강, 적자생존(이 말도 본래 뜻이 크게 오염됐다.), 약육강식의 이데올로기에 절어있다. 잔혹성이라는 양념으로 장아찌를 담그면 현대인일 것이다. 오죽하면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새 생명의 잉태, 창조, 돌봄, 살림이 그 무엇보다도 하찮은 것처럼 여겨지겠는가. 여성의 이런 능력이 아니었다면 그 어떤 생명체도 번성할 수 없었을텐데 배은망덕한 인간은 "어머니"의 은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2.
모든 생명체는 한 번 태어난 이상 삶을 보장받는다. 자연 속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억지로 노동하지 않는다. 앞으로 먹고 살아야 할 일을 걱정하며 생을 막막히 여기지도 않는다. 인간 또한 본질적으로 어쩔 수 없이 남의 밑에서 노역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평생을 돈만 벌다 골골대며 노년을 맞이하고, 인생을 낭비하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심지어 지금은 더 잘 살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필요도 없고, 개발을 더 해야 할 이유도 없다. 오로지 자본을 불리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억지로 뽑아내서 하는 중이다. 마크트웨인이 말했다. 현대 사회의 노동은 구덩이를 팠다가 다시 구덩이를 덮는 것보다도 무의미한 일이라고. 나는 이 말에 백 번 동의한다. 여기서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더 대단한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 그냥 더 많은 돈을 생산하기 위한 무의미한 노동이 대부분이다.
이런 일에 인생을 통으로 바치고, 골병 들어 요양원에 번 돈을 다 써야 한다고? 그런 사회를 만든 건 자연 법칙이 아니라 인간 자신들이다.
나는 존엄하게 살다 가고 싶다. 내 삶을 함부로 낭비하고 싶지도, 나라는 존재를 함부로 대하고 싶지도 않다. 나를 낮잡아 보는 사람들 밑에서 비굴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내 모든 행동이 계산대에 놓이는 것도 싫다. 그냥, 좀, 평화롭게 살고 싶다. 전쟁도 폭력도 학대도 거래도 경쟁도 착취도 싫고, 이 모든 것을 가부장제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이름 아래 방관하는 더러운 세상이 싫다. 자유시장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다. 이건 언어 도단이다. 내가 원하는 건 진짜 "나의" 자유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남들 사는대로 살면 가장 쉬운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게 얼마나 고생하는 길인지 나는 안다. 나는 재미있게 살고 싶다. 게임도 노잼이면 접고 싶은데, 인생이 노잼이어 봐. 함부로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떡할 거야.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인생은 재미가 없다. 재미는 중요한 삶의 원동력이다. 재미있게 사는 방법은 내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소중한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나는 XX 성 염색체를 가진 여성으로서 온전히 나답고 재미있는 삶을 살고 싶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으면 말 수 있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다.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고생하고 싶지 않아서 먼 길을 돌아간다. 여자들이 마음 놓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무릉도원. 어디에서 시작할 수 있을까. 과연 만들어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