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습관

04 불안, 수면제 한 알

by 이단단

가끔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도시의 삶에 익숙해졌음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서 서류를 인쇄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 당연히 카드결제가 될 줄 알고카드 투입구를 찾아 헤매다가 한 3초 정도 황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지폐나 코인만 가능.‘ 카드를 멍하게 들고서. 아, 언제부터 이 삶이 당연했다고. 싶었다.

마침 수중에 현금이 하나도 없어서 ATM기를 찾았지만 그것마저 없었다. 으악. 어떡하지, 겨우 왔는데. 뭐, 내일 해야겠다며 터덜터덜 내려갔다.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날짜에 꼭 해야 한다는 강박이 살짝 밀려 올라왔는데 꾹 참았다. 내일도 오면 되고, 책도 읽고 밥도 먹고 하면서 하면 되지, 너무 화내지 말자며 눌렀다. 그래도 사이사이 새어 나오는 감정은 그대로 일기장에다 휘갈겼다. 아무도 않을 일기장, 아무도 보게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일기장에.

오늘도 오천보 이상 걸었고 선물로 1원 정도 충전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하면서 선물 받기를 클릭한다. 집에 돌아와서 동네 편의점에 들러 먹을거리를 좀 사고 그대로 들어가기가 아쉬워서, 대출한 하루키의 에세이 도입부를 마저 읽고 갔다. 상경하면서 친구도 별로 사귀지 않았고, 딱 해야 할 일만 하고 해외로 나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참 단조로운 일상이다. 여기서 글을 계속 쓰고 올리는 것도 읽어주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도 들지만, 일단 하루키 씨가 관찰한 그대로 쓴 글들을 읽으며 나도 관찰한 모든 것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어쨌든 0.1초라도 달라진 무엇이 있을 것이다. 계속 내 삶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두리번거린다면.




새해부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권을 독파하기로 시작했다. 1월 1일부터 시작했으니 4일 정도 다짐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15% 정도 읽었다. 대출기간 동안 읽으려면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일단 하루에 10페이지씩 나눠 읽자고 나름대로 목표를 정했다. 더도 덜도 말고 10페이지씩만 읽으면, 관성이 붙어서 쭈욱 죽 나아가다가 마침내 1권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해서, 자연스레 모든 업무가 끝나는 밤이나 하루의 마무리하는 시간에 책장을 펼쳐 읽곤 했다.

다른 고전소설도 참 좋아해서(번역본을 보는 거긴 하지만 이야기 특유의 문체나 분위기가 좋다. 어릴 때부터 또래와 다르게 예스러운 걸 참 좋아했다.) 밤에 소설 읽는 재미가 있었다. 밤엔 또 조용하게 일 꾸미는데 최적인 시간이라서 취미가 맞는 사람들과 같이 읽을 책은 뭘로 할까. 그려보기도 한다. 그래서 느슨하게 연대하는 북클럽을 운영하려고 준비 중이다. 북클럽 이름도 정해두었고, 어플에 모임 정보도 올렸다. 매일 혼자서 인증방에 인증도 하고, 곁들여 듣는 음악과 간식사진도종종 올린다.


카라마조프가를 읽는 밤 시간이 좋다. 나는 이 시간을 밤 습관이라고 부른다. 약 복용 때문에 술은 곁들이지 못하니 모임도 점점 줄다가 아예 하지 않고 있다. SNS는 삭제한 지 세 달째다. 혼자만 다니다 보니, 예전보다 삶이 좀 많이 재미없어졌지만(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이 보면 뭐가 변했다는 건데? 할 정도) 그래도 간식을 먹으면 조용한 새벽에 읽는 문장의 맛을 실제로 체감하는 것 같아서 좋다. 읽다 보면 다음날이 되고 새벽이 되면 전날 먹은 것들이 리셋되듯 배가 살짝 출출해지는데, 그때 손에 잡히는 간단한 간식을 먹는 게 어느덧 밤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나친 음식은 시키지 않도록 항상 노력하고 있다. 갑자기 소소했던 독서시간이 대량의 떡볶이 세트와 족발 세트로 변질되면 혼란스러울 것 같으니까. 폭식은 고쳐야 하니까. 되도록이면 글을 채우고 접시는 빈 상태로 남겨두어야지.




이상하게 몰락해 가는 이야기를 읽으면 단 게 당긴단 말이지......

읽으면 읽을수록, 카라마조프의 결핍이 느껴지는 것 같다. 왠지 칭찬받고 싶어서 자꾸만 어그로(?) 끄는 초등학생 같기도 하고, 익살맞지만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호불호가 갈릴 인물이지만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다가 또 밉기도 하고 그렇다.


카라마조프는 농장의 대지주이고, 속된 말로 말하면 완전 쓰레기로 그려지는 인물이다. 자신의 계산에 따라사랑도 생겼다 말았다가 하는 인물이다. 두 명의 여자를 보쌈하여 결혼하고, 각 1명, 2명, 즉 삼남을 방치한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불쌍하다고 온 동네방네 하소연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부인이 죽어가다가 죽었는데도, 아들들이 방치되어 우는데도, 온갖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패드립을 일삼는다. 결국 보다 못한 아들들과 숙부와 함께 조시마 신부를 찾아가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러던 도중 카라마조프는 또다시 무슨 패드립을 남기는데, 그걸 들은 조시마 신부는 말한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며 살지 말라'라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결국 내부에서도, 자기 주위에서도, 어떤 진실도 분간해내지 못하게 되며, 그리하여 자기 자신도, 타인들도 존경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도 존경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고,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껏 즐기고 기분을 풀자니 정욕에, 조잡한 음욕에 빠져들게 되고 결국 완전히 짐승과 다름없는 죄악의 소굴로 빠져들게 되는 법이니, 이 모든 것이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거짓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화가 나는 것도 이따금씩 아주 통쾌한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또한 사람이란, 아무도 자기의 화를 돋우지 않았건만 그저 저 혼자 잔뜩 화가 났노라고 지어내고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장식 삼아 거짓말과 과장을 부풀리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 겨우 콩알 몇 개로 산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도 통쾌할 때까지, 커다란 만족을 얻을 때까지 화를 내서 모욕감에 시달리다가 결국엔 상대방을 진정으로 적대시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 일어나 앉으시지요. 정말 부탁입니다. 실은 이것조차도 모두 거짓시늉이 아닙니까......'


결국 카라마조프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에 쌓여 허덕거린 것이 아닐까. 자신은 괜찮다며, 아닐 거라며 자신에게 거짓말한 대가로 더 화를 내고, 외로워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천하의 X 놈이(x위치가 잘못된 거 같지만) 외로운 건 그 나름의 이유는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행동은 전혀 납득할 수 없지만. 그냥 그래서 그랬구나. 할 정도로.


나도 카라마조프처럼 외로운데 외롭지 않다고 그러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약하지 않다며 바락바락 대들다가 우울증이라는 것에 잠식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주변 사람들이 주는 감정을 내 감정으로 해석하고 그대로 수용했던 것들, 그러면서 오히려 익살을 떨곤 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괜찮다며 관계를 이어오고, 억지로 만나고 또 상처받고 울고. 나도 스스로 무슨 가면을 쓴 건지도 모르고, 마찬가지로 자신이 무슨 가면을 쓴 건지도 모른 채 상대방을 가려가며 악의 없이 내뱉던 농담들이 생각난다. 유머가 분위기를 풀어준다고 믿으며 애써 가렸던 시간들 따위가 휘리릭 지나간다. 아니, 그렇지만 유머는 불편한 진실을 아프지 않게 드러내주는 장점도 있잖아. 그래서 나는 익살을 떠는게 좋고, 그런 사람을 좋아해. 그런 사람은 뭔가 큰 슬픔을 감추고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픔고 있는지 궁금해지거든. 그런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정감이 가고, 그러면서도 살짝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게 좋다.


이 책이 나오고 수세기가 지난 지금도, 카라마조프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현실에 살짝 가라앉기도 하면서 감정이 춤을 추는 밤이다. 이런 날이면 나는 내 안에서 나이트 댄서가 된다. 지루한 이야기지만 하루동안 관찰한 이야기를 쓴다. 오늘응 사람보다 책에 더 몰두했을 뿐. 오늘은 물복숭아처럼 살짝 물렁한 이야기. 내일 또 늦게 일어날지 모르니, 수면제를 한 알 먹어야겠다. 루틴이 깨지는 것은 아직 참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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