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8월의 기억
아침에 눈을 뜨고 적는다. 눈을 뜨면 자동으로 드는 생각. 오늘 하루는 얼마나 지난할까. 혹은 오늘 무슨 별난 일들이 생길까. 생각한다. 평소 하는 일을 하면서, 휴무를 완벽히 보내기 위해, 늘어져 있지 않기 위해 계획을 확인했다. 오늘은 공부를 해볼까 무엇을 할까, 계획을 짜는 일도 전처럼 명확하지 않고 펜만 빙글빙글 돌린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남길까.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별안간 탁자 옆에 놔두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규칙적인 속도로 부르르 몸을 떨어대는 휴대폰을 집어 들곤 번호를 확인한다. 모르는 번호는 평소 받지 않는데 이상하게 받아야 할 것 같은 전화라는 직감이 들었다. 지방에서 살 때는 02가 전부 스팸이었는데, 나는 서울에 있으니까 이제 다른가? 몇 분간의 고민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상대편도 흠칫했는지 거의 10초간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도 스팸전화인가 보다. 끊어야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인다면 쉽게 보일 가능성이 크니까, 한 번에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저기, 안녕하세요. 여기 ---가정의학과입니다.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올려놓으신 이력서 보고 연락드렸어요."라고 말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중년인듯 했다.
생뚱맞게 여기서 왜 전화가 왔지? 혹시 술김에 지원했나? 나는 전 남자 친구들의 연락처는 모조리 삭제하거나 차단해 놓은 상태라 그들에게 자니?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 병원이나 비의료 직종 아르바이트 홈페이지에 들어가 지원 버튼을 누르는 주사가 있었다. 다행이랄지 새로운 종류의 민폐 주사인지 모르겠다.
변명을 하자면 새벽에 올라오는 공고에는 꽤 괜찮은 것들이 많아서 평소 하지 않았던 일이라도 술김에 용기를 내 지원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적어놓고 보니 논리에 맞지 않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만큼 힘들었다. 해보지 않은 일을 도전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방금 그곳도 내가 술김에(?) 지원한 곳 중에서 한 곳인가 싶었다. 새벽감성은 정말 사람을 여러 번 당황시키는구나. 다음부턴 진짜 설령 그곳이 진짜 일하고 싶은 곳이라고 판단했더라도 아침에 지원하도록 하자. 새벽 감성이 아침의 이성 앞에 심판받는 느낌은 여러 번 겪어도 부끄러우니까. 보고 있던 컴퓨터를 휘리릭 뒤져서 사이트에 들어가서 지원내역을 보니 방금 들었던 기업은 없었다. 공개 이력서를 보고 전화가 온 것이겠구나. 이런 일도 진짜 있다니. 매일 내가 회사를 찾아다녔지, 회사에서 전화 온 적은 별로 없었는데. 의문 반 긴장 반, 설렘 반이 섞인 감정으로 나도 곧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평소 경계를 자주 하는 편이라서 재차 확인했다. 취직이 급한 주제에. 비싼 척은? 그래도 할 건 해야지. 급하지만 쉬워서는 안 되지.
"네 안녕하세요. 혹시 어떻게 전화주신 걸까요? 해당 사이트 지원 내역에는 안 보이는데.. "
"아 네 맞아요. 공개해 놓으신 이력서를 보고 전화드렸습니다. 여기는 00동 가정의학과 병원이고요."
"네엡"
"이력서 보니까 해외 계획도 있으시고. 칸 하나하나마다 열심히 살고 계신 게 느껴져서 채용하고 싶어서 전화드린 거예요. 공백이 있긴 하지만 적지 못하신 칸 안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신 흔적이 보여요. 열심히 공부도 하시고 적어도 자기 인생에 책임감 없이 사시는 분은 아니신 것 같아서요. 아, 참고로 여긴 외국 환자분들도 진료 보러 오셔서 영어 공부도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제가 해외 유학은 못 보내드리더라도, 갈 수 있도록 일자리 제공해 드릴 수는 있는데(웃음) "
"... 아아.. 네.."
그 말을 듣고서 대답을 잠시 못했다. 무례한 줄 알지만 그때 나는 울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 싸움, 태움, 고객들의 민원과 폭언을 참다 참다 화병을 얻어 임상 간호사 일을 그만두고, 교대근무를 쉬니까 월급은 반토막이 났고, 취업에 한 줄이라도 보태기 위해 연구 간호사 시절 받은 생활비를 쪼개고 쪼개 십 몇만 원씩이나 하는 자격증을 따며 조금이나마 실력을 쌓고 싶어 열망했던 곳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을 다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잠시 사무직 간호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의 직장상사에게 외모 관리에 대한 지적, 게으르니까 일찍 잠도 안 자고 놀다가 아침에 잔다며 들었던 타박들. (당시 불면증이 심했다. 그래서 아침에 졸렸다. 당연히 일에 지장이 생겼다. 어쨌든 내 실수다.) 어지러워서 쓰러져 이마를 다쳤을 때, 그거 연기 아니야? 하면서 메디폼을 안 붙이고 왜 대일밴드를 붙였을까? 떼볼까? 여기 몸 안 아프고 일하는 사람 어딨어? 하여간 요즘 것들은... 하며 사람들 앞에서 조롱당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목이 메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X세대로 불렸던 상사들이 지금 MZ세대의 기행들을 말할 때 얘는 무조건 이럴 것이다.라는 편견이 나를 후려칠 때, 무기력해졌던 나 자신이 생각나서 한동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병원 원장도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구인자와 구직자. 서로 필요한 존재이니까.
그러나 그 말 한마디로도 나는 그동안 받았던 냉대를 씻을 수 있을 만큼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내 겉모습을 본 사람이 아닌 이력서를 보고 사이사이 적어낸 공백까지 이해해 준 사람이라면, 어쩌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취업은 불발되었다. 일이 되지 않으려면 아예 되지 않으려는지, 어떤 일로 인해 일정이 맞지 않아서 아름다운 이별을 고해야 했다. 조금 더 큰 병원에서 실력을 쌓고 지원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하루 동안 고민한 뒤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라고 생각한다) 사과문자를 드렸다. 이 자리를 빌려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비록 자소설이라고 부르는 자기소개서를 보고 누군가는 그 시간을 후려치고 냉대하지만 누군가는 따스하게 품어줄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없는 눈물로 지운 공백을 보고서 이렇게 다르게 말할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짧았지만 정말 감사했습니다.
당신께서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하시는 일마다 잘 되시기를. 수많은 사람중 한 명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실 수도 있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참 큰 위로가 되곤 합니다.
그리고 저도 나중에는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해주는 인생선배가 되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