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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를 따라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나흘라

by 여행가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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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잿빛의 카이로 빌딩을 벗어나 알렉산드리아의 넓은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를 품은 도시답게 약간의 여유가 거리 곳곳에 배어난다.

호스트 나흘라 집에 도착한 여행자에게 그는 마중 나온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미소로 그는 나를 반긴다.

마네킹과 각종 패션 가구가 가득한 나흘라의 집은

그가 누구보다 멋진 패션디자이너라고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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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지, 소파를 비롯해 각종 물건이 빨간색을 띤다.

빨간 헤어드라이기, 빨간 샴푸, 슬리퍼 등 생활품을 빌려주는 나흘라.

바구니 안에 있는 팬티마저도 빨간색이다.

이제껏 여러 생활품을 호스트가 빌려주었지만,

팬티까지, 그것도 빠알간 팬티까지 빌려주는 적은 처음이다.

처음 본 이에게 거리낌 없이 팬티를 빌려주는 사람.

사뭇 당황하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느낀다.


나흘라와 함께 찍은 사진


올해 39살인 나흘라는 4년 전 첫 해외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은 그에게 잊지 못할 가치를 선물한다.


다양한 이를 만나며 나의 관점을 넓히고,

적절히 자기 돈을 절약하고, 활용하는 법을 익히고,

효율적이며 후회 없이 여행하는 법을 깨닫는다.



"아랍권 남자는 여자를 물건처럼 흘기듯이 보는 경향이 있는데,

여행하며 다른 문화권 남자를 봤어. 그들은 여자를 존중하는 시선을 보이는 거 있지.


아랍권에서 쭉 살아와서 다른 문화권의 남자들을 몰랐던 거야."



나흘라가 준비한 다과들

씻고 나와 안정을 취하는 나에게

나흘라는 따뜻한 이집트 차를 가져온다.

차를 한입 머금고 그는 말한다.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Tell me your story!)"

나는 부끄러워하며 지난 150일간의 세계여행을 늘어놓는다.

순수한 호기심을 여전히 갖고 있는 CEO는 자신의 명성을 들먹이는 법이 좀체 없다.

그저 가난뱅이 배낭여행자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한다.

그가 가진 겸손과 호기심을 바라보며 나도 삶을 묻는다.

나흘라는 패션으로 유명세를 날리는 디자이너이다.

본인만의 패션 회사를 세운 어엿한 CEO이다.

벽 곳곳에 붙은 디자인 도안은 그가 노력해 온 흔적은 보여준다.




"나만의 아이디어가 있었기에 회사를 열었어.

누군가 밑에서 일하는 게 싫더라고.

처음에는 물론 누군가 밑에서 일하며 자금을 모았지."

카이로 로마 패션대학에서 모던패션(modern fashion) 학과를 전공한 그는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자신의 열정을 따라갔다.



"부모님은 내가 대학을 위해 카이로에 살기를 원하지 않으셨지.

패션 배우는 걸 막으려던 시도였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배우고 싶었고,

매일 새벽 6시 기차를 타고 카이로에 가서 수업을 듣고 돌아왔지.

5년 동안 빠짐없이 말이야."

열정이 중요한 원동력이지만,

열정으로 채워지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도 그 앞에 놓여있었다.

쉬면서 함께 남긴 사진

"부모님은 대학 관련 지원을 일절 하지 않았어.

당장 매번 기차를 타는 것도 많은 돈이 들잖아.


그래서 공부하면서 패션 관련 일을 시작했어."

유모로 시작한 알바를 2년 동안 진행하면서

의류 기술을 배운 그는 패션 쪽에서

재단 알바를 하며 고객을 만나고

자신의 실력을 발전시켰다.


그러던 중, 대학 친구가 24살이 되어 결혼하면서 나흘라는 제안한다.

'너를 위해서 웨딩드레스를 만들어줄게.

네가 마음에 들면 사고, 마음에 안 들면 버려도 돼.'

부자인 대학 친구라며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흘라는

보수적이라 느껴지는 여타 이집트인과는

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그의 도전 정신과 추진력은 대학 친구의 마음을 샀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그는 조금씩 자신의 사업을 펼쳐나간다.



"오늘 하루만 머무른다고?"

내일 터키로 떠나는 비행기가 있는 여행객은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는 나흘라를 바라본다.

한참을 아쉬워하던 나흘라는 이내 말한다.


"네가 이집트에서의 마지막 밤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어 기뻐."

마치 마지막 만찬을 성대하게 치를 임무를 맡은 것처럼

그는 비장해진 표정을 웃음 섞여 내보인다.

"오늘 저녁을 특별하게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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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라가 요리해준 이집트 전통 식사


길게 펼쳐진 상은 이미 다리가 부러질 듯 음식이 가득 놓여있다.

주방은 나흘라가 만찬을 위해 초대한 조카들로 북적인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다녀온 나는

음식 조리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흘라에게 묻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데이지, 지금껏 경험해 보지 않은 이집트 전통 요리를 보여줄게!"

오늘 처음 본 손님을 위해

상다리 부러질 듯이 전통음식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회사를 위해 잠을 줄여가며 운영하고, 옷을 제작하는 그가

스쳐 지나가는 배낭 여행객을 위해 땀 흘리며 요리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여인을 사랑스럽다는 말 이외에 표현할 방도가 있을까.


나흘라는 친척을 초대해 함께 저녁식사를 만든다.

주방에 들어서 조카들과 인사를 나눈다.

내게 밝게 미소 짓는 조카들은 재료, 조리 방법을 친절히 알려준다.

손을 걷어 요리를 도와주려고 해도,

극구 말리며 그저 편히 쉬라고 말한다.


IMG_1169.JPG?type=w966 나흘라와 나흘라 친척, 직원분과 함께



한바탕 성대한 만찬이 마무리되고,

만찬을 즐긴 이들도 하나둘씩 떠난 뒤 나흘라와 단둘이 남는다.

우린 만찬 이후의 여운을 다독이며

빨간 소파에 앉아 찻잔을 부딪친다.

고동색으로 우러난 홍차의 온기를 움켜쥔다.

온기는 오늘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꿈같은 일처럼 따뜻하다.

황홀한 저녁을 돌이키는 내게 나흘라는 자신의 우주를 공유한다.


알렉산드리아에 그려진 벽화

"사실 나는 어린 시절이 쉽지만은 않았어.

같은 이집트인이지만 좀 더 밝은 색의 피부, 어두운 색의 피부가 있어.


나는 검은 피부와 곱슬머리의 이집트인이었고, 부모님은 그런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

이집트인 사이에서도 피부색으로 인해 차별과 등급이 있다.


어머니의 밝은 색 피부색을 가진 형제들과 달리

아버지의 어두운 색 피부색을 물려받은 나흘라는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으며 자라왔다.

"둘째, 셋째 넷째 모두 하얀 피부에 예쁜 얼굴을 갖고 태어났어.


나만이 부모님께 인정받지 못했었지.


나는 부모님께 인정받기 위해 더 노력해야 했어.

청소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며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

언제나 가사 노동을 맡고,

궂은일을 하며 구박을 당하면서도 그는

매일 밤, 자기 전에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흘라, 넌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아이야.

슬퍼하지 마, 너는 좋은 삶을 살 거야.'

못생겼다는 이유로 히잡을 씌운 어머니 아래

스스로에게 사랑을 읊던 소녀는

대학이 되어 만난 이들을 통해 본인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대학에서 만난 이들이 내게 예쁘다고 말해주었을 때,

그제야 나도 아름다운 존재라는 걸 깨달았어."

부모에게 질타받은 피부와 머리는 나흘라만의 특징이 되어

그를 더욱 아름답게 밝혀준다.


"나는 나의 피부색과 머리를 사랑해."

수차례 받은 차별 앞에서 스스로에게 사랑을 외치던 아이는

이후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어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어른이 된다.


IMG_0890.jpg?type=w966 알렉산드리아 거리



나흘라의 시련은 부모님의 차별과 구박만이 아니었다.

그는 가족 유전자로 지중해열(Mediterrean Fever) 희귀병을 앓고 있다.

어릴 적 가벼운 감기로만 생각했지만, 죽음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희귀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뒤

그는 약을 통해 하루하루 이겨내고 있다.

"희귀병을 진단받았을 때 신의 메시지임을 깨달았어.

알라(이슬람교의 신)가,

그럼에도 삶을 즐기라고 말하는구나."

어린 시절의 아픔과 희귀병으로 투쟁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성이 되고 싶고,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잊지 않은 나흘라.

그는 여전히 자신 안의 어린아이를 잊지 않고 스스로에게 외친다.


'삶은 아름다워.

나흘라,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야 해.'

"매 순간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어.

저 해는 나를 위해서 빛나는구나.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이 삶을 즐겨야 해.

나의 삶을 그려나가야 해.'


"나흘라,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금 바쁘게 사업 경영을 하면서도

그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어?"

나흘라는 존경스러운 미소를 다시 보이며 말한다.


“모든 사람은 내면에 자기의 어린아이를 갖고 있어.

나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활발한 거뿐이야”


나흘라와 공항에서 헤어지기 전

"데이지, 삶에 대해 조언을 해줄 수 있니?"

고작 21살에 불과한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나흘라는 묻는다.

본인의 회사를 운영하며 유명세를 날리는 CEO가

고작 15kg 배낭이 전부인 나에게 조언을 묻는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그가 사람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느낀다.


그가 가진 삶의 태도를 존경한다.

자신이 일구어낸 발자취에 어깨를 으쓱대지 않고

어린 나이의 사람이더라도,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더라도,

이야기를 듣고, 존중하는 나흘라.

나도 나흘라처럼 나이를 맞이하고 싶다.


나이를 먹고서도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잊지 않는 사람.




사람들에게 나누며 동시에 무거움도 잃지 않는 중심적인 사람.


책임감으로 본인의 역할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


IMG_4359.JPG?type=w966 이집트 사하라 사막의 일몰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이야.

'이 순간은 지나가리라.'

기쁨이 오면 슬픔이 오고, 슬픔이 오면 기쁨이 와.

그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어."

짤막하게 조언하는 나의 말에 나흘라는 말한다.

"데이지, 정말 가슴을 깊이 울리는 조언이야."

작은 경험의 조각보로 이어 만든 조그만 조언을 소중히 움켜잡은 그를 바라본다.

"나흘라, 너도 내게 삶에 대해 조언해 줄 수 있니?"

그는 미소를 짓고는 오래지 않아 입을 연다.

"부모님에게 차별받고 자라오면서 당연히 그리 좋지만은 않은 감정이 있었지.

그러던 날 중, 하루는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할 즈음이었어.

방에서 아버지가 나에게 휴지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갖다 주었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껴안아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끌림을 받은 거지.

그렇지만 난 그를 껴안지 않고 방을 나왔어."


살면서 나흘라를 한 번도 껴안아 준 적 없던 아버지이기에

나흘라는 운명적 느낌에도 남아있는 앙금으로 그를 안아주지 않고 방을 나온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

새벽 1시,

노란 등의 가로등은 고요해진 거리를 비춘다.

나직이 기억을 읊는 그를 바라본다.

"데이지,

너의 목소리를 따라가.

무언가 끌림이 있다면, 하는 거야."


IMG_4368.JPG?type=w966 이집트 사막에서 바라본 일몰



아버지의 임종 순간에 껴안아 주지 못한 자신을 종종 후회하는 나흘라.

그는 덧붙여 말한다.

"네가 누군가에게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말하고,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말해.

네가 누군가를 안아주고 싶다면 안아주는 거야.

네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마.

그리고, 네 안의 목소리를 따라가."

21살 초라한 배낭여행자에게

삶의 조언을 묻는 39살 CEO 나흘라.

어린아이를 존중하고

어린아이로부터 배우려는 그는

삶의 깊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배움을 내게 알려준다.



나흘라가 디자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데이지,

삶은 정말 아름다워.

이 아름다운 삶을 느끼고 사랑해야 해."

이집트의 한 마을에서

우린 새벽 공기를 맡으며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길거리를 걸으며 만나는 다채로운 꽃들에,

아름다운 성을 보며 왜 사람들은 즐기지 못할까?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는 차별받으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왔어도

여전히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름다운 삶만큼이나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나흘라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삶이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이 좋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좋다

남에게 미소를 건넬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나흘라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행복한 시간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지.

호화로운 저녁과 나흘라와의 잊지 못할 티타임을 가진 뒤

빨간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며 지나간 일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내 삶의 이유는 나의 집을 갖고 나의 아이들, 남편을 갖는 거야.
그들과 함께 행복한 나머지 삶을 살고 싶어.


어느덧 시계 초침은 새벽 2시를 알린다.

1시간 뒤면 이집트를 떠나는 비행기에 오른다.

나흘라 덕분에 보낸 황홀한 밤은,

이집트의 마지막 순간을 찬란하게 한다.







Screenshot_20230728_083409_Photos.jpg?type=w966 나흘라와 헤어지기 전


나흘라는 자신의 마음이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말한다며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함께 와주었다.


"데이지, 어떤 샌드위치를 좋아해?"

"음….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그냥 달걀이 있는 거?"

새벽 담화를 마치고 공항에 가기 전 1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나니

도시락 두통에 샌드위치와 과일을 가득 담아 내게 건넨다.

나흘라의 친절과 베풂에 울컥했다.

공항에 앉아 나흘라의 샌드위치를 먹는데,

울컥함과 고마움이 사무치게 밀려온다.

눈물의 샌드위치를 먹으며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나도 새벽 늦게까지 샌드위치를 싸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흘라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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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아름다움의 연속이다.

슬픔도

짜증도

눈물도

화도

나는 아름다움이라 부르기로 했다.

내게 행복과 기쁨, 웃음과 설렘을 알려주는 아름다움.

알렉산드리아의 잊지 못할 밤을 보내니

공항 창문 너머로 아침 해가 뜬다.

감동에 눈물을 흘리며 나흘라가 싸준 달걀샌드위치를 먹는다.

나흘라에게서 받은 지혜와 추억이 더해져 샌드위치는

공항 창문 너머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빛난다.





데이지 (신예진)

enjoydaisypat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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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오마이뉴스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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