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카파도키아에서 만난 야콥
과거를 보는 건 미련한 일이라 생각한 나는
과거를 잘 보지 않는다.
지난 사진으로 추억을 돌이키지도 않으며
지나간 순간은 지나간 대로 두고는 했다.
그런 나도 우연히 과거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지난 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는다.
가끔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나아가는 데 도움을 받는다.
과거는 머물러있는 미련한 것이 아니라
과거는 머물러 있으며 머무름의 힘을 준다.
괴레메 바위들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걸까.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괴레메의 바위는 내게 말한다.
머무름의 힘을 갖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
카파도키아를 이루는 단단한 바위와 같이
잠시 뒤를 돌아보고
나를 정비하며
머무르는 것이 필요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바위의 단단함은
내게 존재 자체로 따뜻함을 안겨준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지금 정처 없이 머물러있는 이 순간에,
신은 나를 어디로 이끌고 싶은 걸까.
여행 중에도 길을 잃은 느낌이다.
누군가 나타나 대신 계획을 세워주길 바라는 걸 아는지,
한 골동품 가게 상인은 내게 말한다.
"신만이 계획을 세울 수 있어."
이집트 사기로 인해 카드 결제사와 소송에 들어가고,
어젯밤 갑작스레 ATM은 나의 카드를 먹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동하는 버스에 있을 나는
틀어진 계획에 머리를 싸맨다.
그런 나에게 골동품 상인은 말한다.
"잠시 우리 집에서 쉬어가.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돼."
그렇게 일주일간 묵게 된 골동품 가게.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도시 괴레메에서
골동품가게 점주 무스타파는 내가 머무는 동
안 숙식을 무료로 제공한다.
대가 없는 그의 나눔에 당황하면서도
필요했던 휴식을 즐길 환경에
마음껏 감사하며 짐을 푸는데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가진 인도인은 인사하며 자리에 앉는다.
"야콥이야. 인도 캐럴라에서 왔어."
그는 무스타파 집에서 며칠 전부터 묵고 있다.
개방적이고 서양 문화에 익숙한 캐롤라 사람들을 봤기에
야콥이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대화가 오래지 않아 쉽게 깨닫는다.
무스타파 어머니, 안네가 아침상을 차린다.
어김없이 따사롭고 평화로운 카파도키아 풍경을 배경으로
야콥과 나는 서로의 우주를 공유한다.
올해 서른 살이 되는 야콥은 학구열 높은 동네에서 자라
옥스퍼드, MIT, 컬럼비아 대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두고 있지만,
그는 디지털 노매드의 삶을 선택해 방랑 여행을 하고 있다.
특출 난 삶을 사는 친구들과 달리 그는 떠도는 삶을 택한다.
"난 나만의 길을 찾은 거지."
경제학을 전공해 직장에 다니기도 했지만,
그는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온전히 자유시간을 즐기며 사는 지금을 더 만족해한다.
자발적으로 표류하는 삶을 선택한 그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인도네시아에서 머시룸을 팔아 돈을 벌며 만난 여자 친구는
요가 강사로 야콥과 같이 여행하며 삶을 보낸다.
그는 여자 친구와 만나 진행할 투어 프로젝트를 신나게 이야기한다.
"장소는 태국으로 하는 거야.
태국 어딘가에 사람을 모아
아침 정해진 시간에 여자 친구가 알려주는 요가를 하고
나머지는 각자 시간을 보낸다.
오후에는 내가 알려주는 무에타이를 하는 거지."
그는 카파도키아에 머무른 이야기도 전한다.
"여자 친구는 이탈리아에 있어.
우린 다시 만나기 전에, 나는 인도에 있다가
다시 오랫동안 머무를 곳을 찾아다녔지."
빠른 여행을 좋아하지 않기에
한 달 동안 오래 머무르며 여행할 곳을 찾았고,
우연히 무스타파 골동품점을 발견한다.
"튀르키예에 오기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머물렀어.
한 호주인이 일거리를 줘서 한 달 넘게 머물렀지.
그렇지만, 오스트레일리아는 별로였어.
머무는 동안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
그는 느린 속도로 삶을 표류하며
돈 많고 까칠하게 구는 삶보다
돈 없이 친절하게 구는 삶을 추구한다.
"선진국일수록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고 불친절해.
왜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 사람들이 더 친절한 걸까?"
우린 돈과 경제적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친절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며
무스타파가 무료로 제공하는 아침 식사의 친절을 음미한다.
수박을 잘라 온 안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테라스 소파에 앉아 수박을 먹는다.
테라스 괴레메 풍경을 채운 기암괴석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우리 옆을 지킨다.
빨갛고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나는 말한다.
"안네랑 무스타파 말이야.
어째서 우리에게 이렇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걸까?"
"어쩌면, 그들에게 아침 식사나 일부 돈은 큰일이 아니겠지.
가령 몇천억씩 오가는 일이라면 그도 쉽게 나누지는 않을 거야.
괴레메 사람들은 모두 자기 호텔을 갖고 호화롭게 사는데,
아무도 그걸 드러내지 않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사람들이 겸손하구나.
어쩌면,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사회가 규정한 걸 수도?"
나는 야콥에게 인도 여행을 들려준다.
동시에 여행하면 겪은 회의감, 가시화된 빈부격차의 충격을 말한다.
"인도 사람들은 대게 카르마를 믿잖아.
명상 선생님께 물었지.
'길거리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전생에 죄를 지은 걸까요.
왜 우리는 배부른 사람과 굶주린 사람이 있는 걸까요.'
명상 선생님은 카르마가 맞으며
그들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답하더라고."
야콥은 말한다.
"물론 그들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정당화하는 건 아닌 거 같아."
"그렇지.
나아가 우리가 당연하게 살아온 삶의 기본적인 것들이
그들에게는 기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매 순간 감사하며 살아야지."
빠르고 가득 찬 여행을 추구한 나와 정반대 여행을 하는 그는
캄보디아 시골에서 지내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권 사기를 당해 경찰과 한바탕 한 이야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하던 이야기도 들려준다.
"일자리를 준 주인이 세차하라고 해서, 세차하고 오니
내게 75달러를 주더라.
사실 세차는 20달러면 충분히 다른 이를 고용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 주인은 그저 옆에 있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나 봐"
야콥은 특유의 '퍽킹'을 말하며 헤어지는 내내 웃음을 전달한다.
팔과 다리에 문신이 가득한 그는 보수적인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 할머니는 보수적인데, 퍽킹 내 문신을 지우고 싶었는지
내가 퍽킹 자는 사이에 수세미로 퍽킹 내 팔을 문지르고 있더라니까"
"15살에 결혼하셨다고 했나?
나도 인도에 화장실 없는 마을에서 봉사하면서 느꼈지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아."
퍽킹을 가득 담아 웃음 나는 경험을 공유하는 야콥을 보며 한바탕 웃는다.
카파도키아에 머무는 동안
야콥이 들려준 퍽 킹이 야기와
인생과 관련한 진중한 이야기를 넘나들며
서로의 여행에 온기를 깃들게 한다.
어느덧 괴레메의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밖에서 잠드는 건 일상이 되었고,
난 그 일상을 사랑한다.
평화롭던 시간이 흘러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날이 찾아온다.
우리에게 차려진 안네의 아침상이 유독 푸짐하다.
"오늘 무슨 날인 건가?
아침이 더 푸짐하게 보인다."
야콥은 말한다.
"모든 날은 특별한 날이지.
그렇지만, 오늘은 네가 떠나는 날이잖아."
야콥과 자흐라는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데려다준다.
마지막으로 포옹하며 야콥은 말한다.
"데이지, 앞으로의 여행도 건강해."
머물러있는 괴레메의 돌덩이가 가진 단단함을 존경하지만,
종종 카파도키아에서의 머무름이 지루하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속에서
대폭소를 부르는 야콥의 이야기와,
진지함을 잃지 않는 삶에 관한 이야기,
평화롭게 눈을 떠 맞이하는 아침,
소소하게 우주를 공유하던 아침 식사,
종종 다른 기암괴석을 보러 나갔던 나들이,
어정쩡하게 올랐던 야콥의 오토바이는 내게 말해준다.
머무름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준다고.
과거를 보는 건 미련한 일이라 생각한 나는
과거를 잘 보지 않았다.
지난 사진으로 추억을 돌이키지도 않으며
지나간 순간은 지나간 대로 두고는 했다.
그런 나도 우연히 과거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지난 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는다.
가끔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나아가는 데 도움을 받는다.
과거는 머물러있는 미련한 것이 아니라
과거는 머물러 있으며 머무름의 힘을 준다.
괴레메 바위들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걸까.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괴레메의 바위는 내게 말한다.
머무름의 힘을 갖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
카파도키아를 이루는 단단한 바위와 같이
잠시 뒤를 돌아보고
나를 정비하며
머무르는 것이 필요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바위의 단단함은
내게 존재 자체로 따뜻함을 안겨준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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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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