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 그 첫 번째 이야기
기억은 37년 전쯤으로 돌아간다. 모처럼 일찍 학교에서 마친 뒤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온 어느 날, 나는 당연히 집에 계실 어머니보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소주병 서너 개를 먼저 보게 되었다. 집에 계셔야 할 시간에 도대체 어딜 가셨는지, 게다가 저렇게 많은 양의 술을 마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손님이 왔다 갔다고 하기엔 집이 너무 어지러웠다. 아무리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에 술 탄 듯한 성격의 어머니라고 해도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건넌방에서 술에 취해 두서없이 부르는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설마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머니였다. 단 한 번도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어머니가 그 술을 다 드셨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방 안은 온통 술 냄새가 진동했다. 정신을 차리라며 물을 갖다 드리니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누워 이내 주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산 세월을 아마 소설로 쓰면 열 권은 충분히 나올 거다. 누가 이런 내 마음을 알겠냐?”
그 경황없던 때에도 그 말은 내 뇌리에 또렷이 남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진지하게 어머니에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내가 글을 못 써서 그렇지, 만약에 글 쓰는 법이라도 배웠다면 대하소설 한두 편은 쓰지 않았을까 싶구나."
"배워서 글을 쓰려는 생각을 버려야지. 하고 싶다면 해 봐, 엄마.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학력도 변변찮은 어머니가 글은 무슨 글이냐며 눙치고 말았지만, 정작 어머니의 그 말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어머니가 그때 하셨던 말씀은 사실 TV를 보다가도 어렵지 않게 듣곤 한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인물 중에서 유독 기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꼭 꺼내는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렇게 기구하고 팔자가 사나운 인생을 사신 것까지는 알겠는데, 왜 소설 타령만 하며 생각에 그치고 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최소한 지금의 나 같았다면 그 기가 막힌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 글로 옮겨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노년에 접어들거나 혹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서 '내 삶은 바로 한 편의 소설'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곤 한다. 세상의 모든 서점과 그 속에 있는 책을 찾아본 것은 아니라서 확신 있게 말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정작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손으로 쓴 '그 대하소설'을 본 기억이 없다. 과연 그들이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 글을 쓰지 못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일반적인 글쓰기보다 조금은 더 까다로운 소설 쓰기의 이론과 그 방법을 익히지 못해서 마음속에서만 한평생 그렇게 눌러두다 세상을 하직해야 했을까?
한 30여 년 전쯤 나는 어디로 갈지를 몰라 헤매던 중에 길 잃은 한 마리의 개를 보게 되었다. 평소 같았다면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꽤 덩치가 큰 개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큰 래브라도 레트리버였지 않았을까 싶다. 순간적인 감정이입이 되었다고나 할까, 며칠 동안 목욕은커녕 제대로 먹지조차 못해 보이던 그 녀석은 꾀죄죄하고 볼품없던 당시의 내 모습과 판박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녀석을 집에 데려왔어야 했었다. 평생을 내가 아끼고 사랑해 줬을 텐데 막상 그런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못했던 때였다. 죽겠다며 집을 뛰쳐나온 놈이 무슨 정신에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었을까? 아무튼 그날 서너 시간은 그 녀석과 함께했다. 심지어 나는 녀석에게 이름까지 붙여줬다. '돌쇠', 그날 이후로 개통해서 쓰게 된 몇몇 포털사이트의 내 아이디가 'dolsoi72'인 데에는 이런 기가 막힌 사연이 있었다. 하마터면 인생을 등질 뻔한 나를 그 녀석이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던 돌쇠였다. 그 더러운 녀석을 쓰다듬고 안으며 뒹굴었던 그 시간이 내게는 조금도 해롭지 않은 시간이었다. 거기까지가 딱 그 녀석과의 인연이었던 건지 뭐라고 좀 먹이고 싶어서 근처의 가게에 들렀다 왔을 때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돌쇠는 내게 꽤 오랜 여운을 남기고 떠났다. 긴 시간 동안 돌쇠를 그리워했던 나는 기어이 '나와 돌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명색이 내 첫 단편소설이었다. 그 소설을 두고 감히 작품성이나 예술성 따위의 말을 운운해선 안 된다. 일자무식이나 다름없던 내가 그저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생각하고 완성시킨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건 이사하는 과정에서 내 '처녀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때의 그 첫 집필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그동안 적지 않은 소설을 써 올 수 있었다. 내 어머니처럼 기구하고 팔자가 사나운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어도, 최소한 나는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했다.
소설 쓰기는 가장 완성된 형태의 글쓰기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소설을 쓰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글을 쓰려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길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시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즉 시나 소설을 쓸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도의 글쓰기를 실현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내가 이렇게 소설 쓰기에 가치를 크게 두는 것은, 소설을 쓸 때 우리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한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이라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다 알고 있으며 행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뜻하고, 무소불위는 못할 일이 없이 다 할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건 신(神)에게서나 가능한 일이다. 맞다. 나는 소설을 쓸 때 모든 것을 다 알고 행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신적인 존재가 된다. 갑갑한 방 안에 앉아 있으면서, 혹은 기껏해야 분위기 좋은 카페 정도에 있으면서, 내겐 가지 못하는 장소가 없다. 또 거슬러 올라가지 못할 시간도 없다. 심지어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먼 미래라도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만 두고 생각해도 소설을 쓴다는 것 자체는 상당한 매력이 있는 활동일 수밖에 없다. 과연 내가 어딜 가서 이만한 능력을 발휘해 볼 수 있겠는가?
살다가 보면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라 대략적이라도 형태를 드러내는 순간이 오곤 한다. 몇몇 사람을 내가 선택한다. 처음엔 '아무개'가 되지만, 윤곽이 뚜렷해지는 동안 그들은 명확한 이름을 갖고 당당히 내 앞에 선다. 그들의 이름을 내가 불러주는 순간, 그들은 내게 하나의 의미로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무 장면에나 그들을 집어넣지는 않는다. 최소한 내 계획에 포함된 사람들만 선택한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오직 내 손끝에서 나오는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인물들을 선별한다. 조금이라도 불협화음을 내는 인물은 가차 없이 내다 버려야 한다. 기본적인 생김새를 비롯해 나이와 이름과 성격과 심지어 그의 성장 배경이나 주변 환경까지 모두 내가 설정해 놓아야 한다. 물론 그들은 내가 차려놓은 무대 위에서만 한바탕 놀아야 한다. 허락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인물은 내게 필요 없다. 제아무리 잘났더라도 내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어디로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든 그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들어가는가 하면, 한 사람의 움직임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심리적 혹은 행동적 변화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 행동이 비난받을 만한 것은 못 될 것이다. 실제로 사람을 그렇게 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요즘 흔히 말하는 '가스라이팅'이 되겠지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내가 생각해서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들 뿐이다. 전체의 스토리를 창조한 것도 나이고, 이끌어 가는 것도 나이며,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짓는 이 역시 나이므로, 그 정도의 권한은 내게 있지 않을까?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소설 쓰기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그것은 책을 수십 권 읽는 것보다도, 혹은 잘 만들어진 드라마나 영화를 몇십 편 보는 것보다도 훨씬 가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조금 과장해서 이렇게 말하면 쉽게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시나리오에 따라 내가 감독이 되어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찍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이다. 내 소설 속에 나오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내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내가 'O.K.' 사인을 내릴 때까지 그들은 똑같은 말과 행동을 수없이 반복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상황과 시간으로 언제든 그들을 되돌려 놓을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시점을 택해서 글을 쓰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등은 내 손아귀 안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의 과거의 행적에서부터 현재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또 지금의 행동이 가져오게 될 결과나 미래의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까지 내가 모르는 부분은 있을 수 없다. 만약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 등장인물이라면 시점이 제한된 경우이거나 아니면 내가 창조한 인물이 아닌 경우가 되겠다.
내 좁은 소견에 비춰 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아니다, 보다 더 솔직하게 얘기해야겠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다. 최소한 그들이 심정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이라면 글을 쓸 하등의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어딜 가서 가슴 속에 있는 얘기를 하려 해도 그(글을 쓰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들은 없을지도 모른다. 기껏 어떤 자리가 마련되어 마음 놓고 뭔가를 말하려고 하면 이제 그만 말하라고 하거나, 혹은 말을 하고 있는데도 금세 자리를 뜨기라도 할 것처럼 사람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는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를 포기할 용기가 그에겐 없다.
애초에 그는 가슴속에 혹은 머릿속에 너무 많은 걸 담아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기회만 되면 입에서 뭔가를 끊임없이 쏟아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말을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대부분의 요즘 사람들은 대체로 글을 쓰는 사람을 꺼려하기 마련이다. 만약 그런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누군가가 있다면 최소한 그 누군가는 글을 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그가 이미 작가라면 그나마 작품 때문에라도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일 법하지만, 그저 작가지망생의 입장이라면 그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처지일 뿐이다. 어딜 가도 그는 환영받지 못할 확률이 높고, 남들이 인정하지도 않는 자신의 업적(글쓰기의 과정이나 결과물 혹은 성과 등) 따위에 대해 마구 떠들다가 눈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말보다는 글을 선호하게 된다. 말로 하지 않고 글로 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가슴속에 응어리진 게 많다는 얘기이다. 누군가가 들어줄 이가 없으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글을 쓰는 우리는 가끔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떠안은 듯 행세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주변 사람들은 다 생각이 없고 우리만 깨어 있는 것처럼 글을 쓸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 많은 할 말을 담아두기엔 버겁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존재의 이유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할 말이 참 많다. 가족에게도, 주변의 지인들에게도, 심지어 직장 동료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그런 내 말을 들어줄 그 누군가가 옆에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더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기기도 한다. 나의 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결국은 내가 끝내 그걸 글로 쓰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많은 말들이 내 존재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겠다. 그렇게 보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설을 쓰려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몇 번이나 말했듯 우리는 외롭기 때문이고, 그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바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다 더 고차원적인 의미에서의 '고독'이라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혼자가 되어 버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혼자가 된 고독을 누리기 위해 결국엔 글을 쓰게 된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겠나 싶다.
말로 할 때에는 그 자리에 있던 몇몇의 누군가가 듣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앞에서 말했으니 이 방법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그러면 나는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바로 그것이 글쓰기이고, 또 소설 쓰기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말로 먼저 표현했어야 하는 것이다. 지인이나 친한 친구도, 심지어 가족마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젠 가족 내에서도 뚜렷한 경계가 그어져 웬만해서는 가족의 이름 하나만 믿고 서로의 테두리 안으로 발을 들이기가 쉽지 않은 세상, 시쳇말로 '쿨'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경계 안에 내가 발을 담그길 그들이 원하지 않듯 그들 역시 그어 놓지도 않은 나의 선 안으로 다가오는 일은 없다.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세상, 혼자의 힘으로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또 같은 마음을 담아 나는 소설을 쓴다. 그렇게 외치지 않으면 혼자만 알고 있는 그 비밀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담아두고 또 눌러놓기만 한다면 스스로를 지탱해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혹시 당신도 할 말이 많은데 주변에 딱히 그 말을 들어줄 만한 사람들이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당신 역시 '당신의 삶은 한 편의 대하소설과 같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글을 쓰면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설을 쓰면 된다. 언제든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또 다른 당신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글쓰기에 있어서 시간의 구애 같은 건 없다. 공간적으로도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생각한 것을, 혹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면 같은 자리, 같은 시간대에 있는 누군가가 지금은 당신 앞에 없더라도 언젠가는 그들이 당신의 글을 읽어 줄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있다. 만약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 어떤 논리성이라도 갖추려고 안간힘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이지 못한 글은 독자에게 외면을 받는 게 마땅하나 적어도 우리가 쓰려는 소설은 논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서 잘 썼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 쓰는 게 글의 본질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소설을 쓸 때 글을 꾸미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쓴 당신의 소설을 누군가가 칭찬한다고 해도, 반드시 또 다른 그 어떤 누군가에 의해서 당신이 쓴 소설은 난도질 당할 운명에 처하기 마련이다. 그냥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당신의 모습을 적으면 될 일이다. 진정으로 당신이 살아온 과정이 몇 권의 소설과 맞먹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당시의 일을 있었던 그대로 적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게 쓴 글이 바로 나이고 당신이다. 또 그것이 어쩌면 글을 쓰고 싶어하는 나와 당신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다분히 못난 모습이면 어떤가? 그 많은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어디 가서 이야기한다고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걸 들어줄 사람은 어차피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데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렇게 당신의 모습을 마주 볼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쓰는 혹은 쓰게 될 소설을 통해 한 뼘 더 성장할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할 말이 많은 당신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당신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신이 될 기회를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소설을 써 보라며 감히 권유하려 한다. 아무런 이론적인 지식이 없어도, 단 한 번도 소설을 써 본 적이 없어도 당신은 충분히 소설을 쓸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했듯 당신에게도 그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비로소 소설 쓰기의 첫발을 떼고 만 당신에게 미리 축하의 인사를 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