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케 Sep 07. 2022

오늘의 행복

[일기시대]를 읽고

문보영-일기시대를 읽고


정확히 오전 6:40분 이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의 침대에서 내 핸드폰의 진동이 울린다. 기상 시간이 다른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더 일찍 일어나는 나는 아침 알람을 진동으로 맞춰두었다. 진동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얼른 핸드폰 화면을 켜 알람을 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잠깐 정신을 차려 오늘이 어떤 날인지 계산한다. ‘맞다. 나 오늘 연차.’ 지금 이 행복을 위해 일부러 알람을 미리 꺼 두지 않았지. 설명할 수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잠든다. 

오늘은 엄마와 약속이 있는 날이다. 그랜드 하얏트 호텔 식당에 점심 예약을 해 두었다. 이렇게 쓰면 꼭 이런 호텔에 편하게 가는 돈 많은 사람 같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올해에는 어버이날 선물 대신 엄마와 좋은 식사를 하고 싶었다. 

작년에 가 본 그랜드 하얏트 호텔은 내가 본 호텔 중 가장 좋은 호텔이다. 로비에는 추리닝을 입고 한 손엔 샤넬 가방을 들고 다른 손엔 루이비통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녔다. 종업원들은 눈만 마주치면 필요한 게 있냐며 웃는 얼굴로 묻는다. 연말이라고 꾸며 둔 크리스마스 트리도 아주 크고 화려했다. 호텔 근처에선 남산타워도 예쁘게 보여 밥 먹고 나서 산책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랜드 하얏트 호텔처럼 좋은 호텔에 와 본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느낀 여유를 선물하고 싶었다. 

5월 초부터 예약을 알아봤지만, 가정의 달이라 그런지 쉽지 않았다. 겨우 잡은 예약이 바로 5월의 마지막날, 평일인 오늘. 이 식사를 위해 나는 소중한 연차까지 썼다. 우리가 예약한 2부 식사는 오후 2시부터 시작이니, 집에서 12시 40분 쯤 나가면 아주 넉넉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 비즈 팔찌를 만들어야지. 그러려면 9시 쯤 일어나면 딱 좋겠다.

… 라고 생각했었는데, 눈을 뜨니 11시 30분이었다. 이쯤 되면 나에겐 휴일 아침에 무조건 늦잠을 자는 병이 있는 것 같다. 

녹사평 역에서 엄마랑 만났다. 택시를 타고 호텔까지 가면서 최근에 내가 갔던 어마어마한 결혼식에 대해 얘기했다.

“화환이 무슨 백 개는 되는 것 같았어. 국회의원 화환까지 있더라니까? 위대한 개츠비 파티인 줄 알았잖아.”

“어머 어머. 그 정도인데 전혀 몰랐다고? 그 친구가 그런 티를 안 낸게 굉장히 겸손한거네. 대단하네 그 친구.”

엄마에게는 내가 최근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말하게 된다. 나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엄마는 나의 모든 이야기를 궁금해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결혼식이 아주 성대했다는 속물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나의 인성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에겐 나의 온 마음을 내 보이게 된다. 

식당은 호텔 지하에 있다고 했다. 이름은 “테판”. 나도 이 호텔에만 와 봤지 이 식당은 처음이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후기만 봤을 뿐이다. 예전의 난 비싼 곳에 가면 비싼 돈을 내고도 괜히 눈치를 봤었다. 고급인 곳에 익숙하지 않아 잘 모르는 것이 창피해서. 하지만 이제 (실제로 익숙하지 않으면서) 괜히 익숙한 척 하는 것이 왠지 더 쑥쓰럽다. 그래서 그냥 묻는다. 혹시 지금 미리 들어가면 안 되나요? 후식도 나오나요? 자리 변경은 안 되는 건가요? 뻔뻔해진건지, 담백해진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이 확실히 편하긴 하다. 

식사는 아주 맛있었다. 테이블 바로 앞에서 요리 과정을 보여주는 구도라 재미있기도 했다. ‘어머 저거 한우 빛깔 봐.’ ‘저거 동그란거 작은 건 뭐야? ‘무 같은데.’ ‘무는 절대 아니야.’ ‘무 아닌가?’ … “이번에 드실 요리는 어린 무를 곁들인~” ‘그것 봐. 무 맞잖아. 어머 근데 무도 이렇게 맛있어. 세상에. 세상에.’ 식사 내내 엄마랑 소근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식사가 끝날 때 쯤 이었다. 

“엄마. 여기 요리 왜 이렇게 맛있는지 알려줄까?”

“왜? 해외에서 공부한 요리사들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한 끼에 13만원이라 그래.”

“… 한 사람에..?”

엄마는 그 순간 문화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리고는 내게 고맙다고 했다. 누군가는 내게 굳이 그렇게 생색을 내야 하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딸이 한 끼에 26만원을 쓴 게 아깝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딸이 엄마를 위해 한 끼에 13만 원이나 하는 식사를 대접한 걸 고마워 하는 사람이란 걸 안다. 그래서 식사 가격을 공개한 것이다. 누군가를 최대한으로 만족시키는 방법은 정말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잘 아는 것과 사랑이라는 감정은 매우 큰 관계가 있다. 

엄마가 갑자기 아빠가 생각나서 혼자 온 게 괜히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빠를 잘 안다. 내가 아빠를 위해 반나절이라는 시간과 26만원이라는 돈을 쓴다면, 나는 가족들을 다 데리고 차를 운전해서 북한강 근처에 있는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정육식당에 가자고 할 것이다. 거기서 아주 좋은 한우를 같이 먹고, 서빙해 주시는 아주머니께 너스레를 떨어 아빠와 아주머니를 한 번 웃겨 드릴 것이다. 

다 먹고 나선 식당 로비에 있는 믹스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나가서 강가를 산책하자고 할 것이다. 그리고 강을 배경으로 아빠와 손가락 하트를 한 사진을 찍고 집에 가는 길에 아빠한테 카톡으로 “아빠 오늘 너무 재밌었어~~ ^^ 예쁜 딸이랑 또 데이트 합시다 ~~ ^^” 라는 카톡을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보낼 것이다. 그리고 아빠가 이 스케줄에 100만큼 만족한다면, 엄마는 아마 딱 60만큼만 만족할 것이다. 

집에 오는 길에 엄마에게 오늘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보내줬다. 그렇게 나는 또 오늘의 행복을 만들었다. 이상한 건 갑자기 지금의 이런 순간들도 언젠간 돌아갈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조금 우울하기도 했다. 마치 쫓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일기시대를 읽으며 계속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나에겐 소중하지만 남에겐 평범할 나의 하루도 재미있는 글이 되어 읽힐 수 있을까? 마치 이 책처럼 말이다. 5월의 마지막 날 하루의 일기를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써 봤다. ’일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이 책에게 한 번의 감사를.   

이전 09화 달래장 같은 내 인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