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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왕이 된 자

SF소설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1776년 3월 10일, 창덕궁.


새벽. 인정전 위로 스며든 햇살. 기와 위에 맺혀있는 서리.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궁궐을 감싼 차가운 공기.


거울 앞. 정조의 머리 위에 놓인 면류관. 무거웠다. 곤룡포가 어깨를 덮었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황금빛 용이 수 놓인 옷감. 스물다섯 살, 아직 왕이 되기엔 어린 나이.


정조 뒤에 서 있는 율. 차가운 빛을 발하는 은빛 갑옷.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위험 요소를 탐지하고 있다. 인정전 안팎의 모든 움직임이 율의 내부 회로 속으로 흘러들었다. 저 멀리 줄지어 서 있는 신하들. 문무백관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중엔 노론의 대신들도 있었다. 김종수의 얼굴이 보였다. 차가운 표정. 미세하게 내려가 있는 입꼬리.


율의 내부에서 데이터가 순식간에 분석되고 있었다.


[ 김종수 | 노론 벽파 | 정조의 정적 | 위험도: 상급 ]

[ 기타 노론 신하 106명 | 위험도: 중급에서 상급 ]

[ 남인 계열 167명 | 지지 세력 | 위험도: 하급 ]

[ 소론 잔존 세력 12명 | 중립 | 위험도: 중급 ]


의식 속에서 정렬되는 숫자들. 계산되는 확률. 오늘 즉위식에서 정조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 12.7%.


율은 알고 있었다. 진짜 위험은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다.


"전하, 준비되셨습니까." 율이 조용히 말했다. 정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닮은 눈매. 사도세자의 눈매.


'아버지'


드디어 오늘, 당신이 이르지 못했던 그 자리에 갑니다.


정조는 돌아섰다. 내관들과 호위무사들이 뒤를 따랐다. 그중에서도 율은 정조와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복도에 울리는 여러 발걸음 소리. 차가운 돌바닥 위로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졌다.


인정전의 문이 열렸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시다. 정조가 용상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이는 문무백관. 예법에 따라 절을 올렸다. 사배례(四拜禮)였다. 전각을 채우는 엄숙한 침묵.


정조의 뒤편에 은빛 갑옷을 입고 서있는 호위무사, 율. 신하들은 궁금해했다. 저 자는 누구인가. 어디서 온 자인가. 정조가 입을 열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목소리가 인정전을 가득 채웠다. 단호했다. 주저함이 없었다. 신하들의 반응을 분석하느라 율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김종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입술이 얇게 떨렸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노론 신하들의 눈빛에서 당황스러움과 분노와 경계가 읽혔다. 반면, 남인 계열 신하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 차보였다. 정조를 지지하는 세력. 밝은 눈빛이었다.


율의 내부에서 급속히 변화하는 데이터.


[ 정치적 위험도: 기존 22.3%에서 37.8%로 상승 ]

[ 노론 벽파의 반발 가능성: 89.2% ]

[ 암살 시도 확률: 기존 12.7%에서 31.4%로 증가 ]


동시에 다른 데이터도 생성되었다.


[ 정조 지지 세력의 결속도: 67.8%로 상승 ]

[ 개혁 추진 동력: 45.6% 증가 ]


"과인은 영조대왕의 손자이며, 동시에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계속되는 정조의 목소리.


"아버지의 '한'을 품고,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 나라를 다스리겠노라."


김종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하, 사도세자께서는 이미..."

"그 입 다물어라. 과인의 아버지를 함부로 말하지 말라."


왕의 위엄이 실린, 정조의 낮은 목소리.

김종수가 물러섰다. 얼굴에 붉은 기가 사그라들었다. 마치 꺼져가는 불씨처럼.


위험한 순간. 율은 김종수를 예의주시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의 생체 반응. 김종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은 즉위식이었다. 수백 명의 신하가 지켜보고 있는.


정조가 펼친 즉위교서가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경천애민(敬天愛民)은 나라의 근본이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함에 힘쓰겠다."

"인재를 등용하고, 직언을 받아들여, 정사를 바르게 하겠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는 자를 뽑아 쓸 것이다."

"부패한 관리를 엄히 다스리고, 백성의 삶을 넉넉하게 하겠다."

"내 조상의 뜻을 받들어, 공정하고 청렴한 정치를 펼치겠다."


율의 내부에서 계속되는 분석.


[ 개혁 의지 강도: 최대치 ]

[ 실현 가능성: 현재 여건상 42.6% ]

[ 정적의 저항: 예상치를 초과할 것 ]


정조가 교서를 내려놓았다. 문무백관이 다시 절을 올렸다. 천세를 불렀다. 목소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천세! 천세! 천세!"


율은 알고 있었다. 그 천세 소리 속에 진심이 담긴 것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즉위식이 끝났다. 신하들이 하나둘 물러나갔다. 김종수가 마지막으로 정조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적의가 잔뜩 서려 있는 눈빛. 율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미래의 위험 요소로 기록했다.


텅 빈 인정전.

정조와 율, 둘만이 남았다.


정조가 용상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봄의 전령 매화꽃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꽃잎.


"어찌 생각하느냐."

정조가 율에게 물었다.


율은 잠시 침묵했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전하의 선언은 정치적 위험도를 37% 증가시켰습니다."

"그것이 다인가."


정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율이 정조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서 푸른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분석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동시에, 다른 것도 일어나고 있었다. 데이터로 계산할 수 없는 무언가.


"전하의 용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율의 목소리. 정확한 주파수였지만, 그 속에 균열이 있었다.


정조가 돌아보았다.

"방금, 네가 용기라고 했느냐."

"예. 데이터 분석상 불리함을 알면서도, 전하께서는 신념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정조의 입꼴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너도 용기라는 개념을 아는구나."

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에 매화꽃 향기가 실려왔다. 쓸쓸하고, 달콤한 향기가.


율의 회로 깊은 곳, 새로운 신호가 흘렀다. 0과 1로 구성되지 않은 신호가.


정조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궁궐 너머로 보이는 한양의 지붕들. 백성들이 살아가는 곳.

그들의 삶을 바꾸고 싶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 말을 한 순간, 과인의 운명이 정해진 것인가?"

율이 정조의 옆에 섰다. 은빛 갑옷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전하의 운명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확신에 찬 율의 목소리였다.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속,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데이터도 분석도 아닌 것이.


"그렇다면, 과인과 함께 그 운명을 써나가겠느냐."


율은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순간, 율의 내부에서 생성된 새로운 프로토콜.


[ 정조 보호: 최우선 순위 ]


매화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하얀 꽃잎이 창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떨어졌다.

1776년 3월 10일. 조선의 새로운 왕이 탄생한 날.

그리고 한 명의 호위무사가 충성을 맹세한 날.


햇빛이 인정전을 가득 채웠다. 새로운 시대의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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