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학생 한 명이 다른 학교로 전학 갔습니다. 가기 전 아이들끼리 모여 송별 모임을 가졌지요.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으나 노란 조명 주위로 도란도란 모여 있는 모습이 아련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는 1년 반이란 시간을 우리 학교에서 함께 했습니다. 박 준 시인이 그랬던가요.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라고요. 다들 익숙함에 눈물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익숙해진 시간들이 늘 우리들의 마음을 문드러지게 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그 아이가 떠나는 이유 중에 어려운 인간관계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2학년이 되고 조금 더 씩씩해졌다고 선생님들에게 뜨문뜨문 칭찬을 듣던 아이였는데요. 그동안 아무도 그 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게지요. 물론 이렇게 황망하게 떠나버리는 것이 아쉽고 슬프지만, 저는 그 아이가 떠나는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읽었습니다. 무엇인지 모르게 어긋나고 있었던 마음들을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따금 타인의 단편만 믿고 삽니다. 이는 진솔한 이야기를 터놓을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지요. 이 아이가 떠난 것도 저의 잘못된 믿음이었지 싶습니다. 조금만 더 깊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 행동 속에서 부조화를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 아이는 자신과 맞지 않는 퍼소나로 살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했을까요.
다시금 듣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숱한 상담을 통해 그 아이와 이야기했지만 결국 그 아이는 겉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시인 이성부는 '슬픔을 직시하는 순간부터 희망이 차지할 공간이 생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의 슬픔을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겉으로 떠도는 그림자들을 보고 살아왔지요. 이는 헛된 생각들이 되고, 이 때문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투로 강요했지요. 그걸 조언이라고 여기며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비폭력 대화에서 '조언'이라는 것도 허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어른들이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쉽게 믿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역사에 따라, 자라난 생각들이 늘 폭력의 씨앗이 됩니다.그러나 그 생각들이 아무리 좋은 해답인들,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듣는 조언은 마이동풍입니다. 조언을 위해서는 상대의 마음을 깊게 끌어 당기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선 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퍼소나를 벗겨낼 수 있는 온전한 공감. 앞으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오늘 전학 간 그 아이가 자신과 맞지 않는 퍼소나를 입고 살지 말고, 희망을 당당하게 노래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