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학교에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얼룩이 묻은 낡은 옷과 신발을 신은 할아버지였다. 그분은 교과실 문을 열고선 다짜고짜 선생님들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 선생님들이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모르고 있는데, 교감 선생님께서 오셔서 그분을 모시고 가셨다. 알고 보니 그분은 근처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퇴임을 하신 분이었다. 퇴임 후에도 교장선생님이라는 정체성을 놓지 못해 여러 학교를 찾아다니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어딘가 짠한 마음과 동시에 직업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우리는 직업이라는 정체성을 나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픽사베이
하지만 우리가 직장을 그만둘 때 ‘옷을 벗는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처럼, 직업 그 자체가 내가 아니라 언제든 입고 벗을 수 있는 옷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고가의 좋은 옷이라 해도 나에게 불편한 옷이 있듯이, 내게 잘 맞고 편한 옷을 찾는 것은 직업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 초등교사라는 직업을 그만둘 때 나는 파커 파머의 <삶이 내게 말을 걸 때>라는 책에서 나오는 소명에 대해, 내가 진짜 가르치고 배우고 싶은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았으나, 단순히 교과적인 지식이 아니라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나누고 싶었다. 무엇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며 그런 경험들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 고민 끝에 몇 년간 마음껏 질문하고, 느끼고, 배우며 지낸 뒤에 나는 난치병 아이들을 위한 학교, 정신건강센터, 평생교육원, 대학문화생활원, 교육청 등 여러 기관이나 단체 등에서 여러 마음 돌봄 선생님, 명상의 숲 안내자, 상담가 등을 일하며 수많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해 왔다. 그리고 공감교육센터 따비라는 상담센터를 열어 ‘사람들 마음 안의 얼음을 녹이고, 씨앗을 꽃피우는 따뜻한 비’처럼 살아가고자 했다. 상처와 아픔으로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있던 몸과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다시 웃음이 피어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가슴 한가득 꽃이 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글을 쓸 때면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가슴에 꽃을 피워내는 영혼의 정원사’로 살아가는 꿈을 가지고 있고, 매일 그 꿈을 실현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나의 꿈과 소명에 대해 점점 명확해지며, 나는 지금도 매일 가르치고, 배우며,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능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밝게 인사하고, 작은 친절이라도 나누고, 다른 사람 안의 빛을 보고 전해주려 노력한다. 내가 가진 여러 직업은 그 꿈을 위한 통로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통 아이들에게 꿈에 대해 물어보면, 아이들은 직업을 얘기한다. 20,30명 남짓한 교실에서 물어보면 아이들은 꿈은 보통 10가지 내외로 정해져 있다. ‘의사, 판사, 연예인, 운동선수, 교사, 공무원’에서 최근에는 ‘건물주, 유튜버’ 등의 직업이 더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꿈은 진정한 자기 탐색에서 나온 진짜 꿈이 아니라 대부분 부모님이나 외부로부터 온 가짜 욕망인 경우가 많다.
AI와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달로 대다수의 직업이 사라지고 변화하는 시대 안에서도 아이들의 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아, 지금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미래에 사라질 직업을 위한 교육’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와 상황 속에서 아이들의 꿈과 직업을 탐색하기 위해 어떤 수업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북미 원주민들이 성인식을 할 때 혼자 숲 속 깊은 곳 성스러운 장소로 들어가 며칠 밤 두려움을 이기며 내면의 소리를 듣는 ‘비전 퀘스트(Vision Quest)’에서 그 힌트를 얻었다. ‘소명 찾기’나 ‘신명탐구’라고도 번역되는 이 시간 동안 아이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이며, 나는 세상에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서 왔을 때 아이는 비로소 사회에서 역할을 해나갈 수 있는 성인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나는 내가 만나는아이들에게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충분히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꿈은 점점 더 선명해져 가는 것이 보인다.
옥이샘 미술수업을 참고해 지도한 아이들 그림
10여 년 전에 수업 시간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세상에서 숨 쉬고 있는 한 생명체’,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이끼 등 작은 생명들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썼던 한 아이는 졸업 후에도 나와 연락을 지속하며 제인 구달 강연도 함께 가고, 좋은 책들도 나누며 지냈다. 그 아이는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할 때 환경생태학과에 진학해서 독일에 교환학생을 다녀오더니 졸업 후 숲연구원 인턴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숲을 연구하고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곧 독일과 핀란드로 유학을 간다. 그렇게 아이들이 자신만의 꿈과 소명을 이뤄나가는 것을 지켜볼 때 나는 크나큰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그럴 때면 ‘소명이란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프레더릭 뷰크너가 말에 더 깊이 공감이 된다.
꿈과 소명,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아이들과 보는 영상 중 Where the hell is matt?이라는 영상이 있다.
Matt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꿈이었던 세계 여행을 하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처음 영상에서는 혼자서 춤을 추지만, 몇 해에 걸쳐 만들어진 영상에서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춤추기 시작한다. 나는 그 영상들을 보며 진정한 꿈과 소명을 이뤄가는 과정도 이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 안에서부터 나오는 춤을 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기쁨이 전해져 주변의 존재들까지 춤추게 하는 것, 서로를 살리고 꽃 피우게 하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꿈이자 소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우연히 지나간 골목길에서 아름다운 시들이 입간판으로 세워진 작은 빵집을 발견했다. 시구절이 발걸음을 멈추게 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우리밀 통밀로 정성껏 건강한 빵을 만드시는 사장님이 계셨다. 빵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시며, 건강한 빵과 시를 나누는 삶을 살아가시는 사장님은 모든 꿈을 이룬 사람처럼 환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엄마에게 보내드릴 빵을 택배로 주문하며 연락을 드렸을 때 사장님께서는 내게 새로운 시 한 편을 보내주셨는데, 그 시에 내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이루고픈 꿈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내가 바라는 세상
이기철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입니다.
한 번도 이름 불려지지 않는 꽃이
길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 지어 부르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는 꽃이
혼자 눈시울을 붉히면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럼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입니다.
*
이처럼 꿈을 이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꿈꾸게 한다.자신의 꿈을 이뤄 행복한 사람들은 다른 존재들을 행복하게 한다. 남은 생동안 나는 더 많은 아이들이 마음껏 자신만의 꿈을 꾸고 또 그것을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고 지지하고 싶다. ‘꿈꾸지 않으면’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