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하다
“유미 씨는 도시에 사는 수도승 같아요.”
그가 이런 말을 한 건, 몇 주 전에 나눈 대화 때문이다.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진짜 직업이에요. 그림 그리는 건 부업이죠. 종일 저를 돌보다보면 하루가 빨리 가요. 심심할 틈이 없다니까요.”
“얘기를 들으니까 나도 종일 혼자 있고 싶어져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나만의 방을 갖는 기분? 그럴 것 같아요.”
그가 찰떡같이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나만의 방이란 표현 좋은데요. 저는 그게 일상이 됐죠. 생각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진짜 많아요. 정말, 정말 바쁘다니까요.”
수도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투스Benedictus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하고 일하라.” 수도사들은 그의 가르침에 따라 하루 일곱 번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학문을 연구하거나 땀 흘려 일을 했다고 한다.
시끌벅적한 모임이나 쇼핑에 취미가 없는데다, 명상을 하거나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지금 살고 있는 스무 평 남짓한 가정집은 1인용 수도원인 셈이다. 이 집을 처음 봤을 때, 큰 방을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서재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늬가 없는 수수한 흰 벽, 너비가 3미터는 돼 보이는 큰 창문. 그 열린 틈 사이로 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게 좋았다.
내 취미는 창틀 위에 팔을 괴고 바깥 구경하는 것이다. 이렇다 할 것 없는 평범한 풍경이지만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 모두가 쉬지 않고 바지런하게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소소한 감동이 느껴진다. 눈이 일찍 떠지는 날에는 창문을 마주보고 앉아 명상을 한다.
명상이라고 하지만 잠옷차림인데다가 머리는 헝클어져있고 가부좌도 틀지 않는다.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하듯 명상을 시작했기 때문에 격식이야 어찌됐든 내가 가장 편안한 자세면 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요령은 없다. 두 눈을 감고 허리를 바로 세우고 어깨를 밀가루 반죽처럼 뭉글하게 늘어트리면, 의식하지 않아도 호흡이 깊어진다. 정성을 들여서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는 동안 마음이 스트레칭을 하고, 유연하게 살아갈 하루 치 힘을 얻는다.
언제, 어느 때고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들어가 쉴 수 있는 나만의 방이 있다는 것.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면서 찾아온 작은 기적이다.
기적은 또 있었다. 어느 날 주변을 둘러보니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은 남다른 삶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사가 밀려왔다. 친구는 이 기적을 두고 “네가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아직도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마음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을 테니까.
누구에게나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하다. 그곳은 벽과 창문이 있는 물리적인 공간일 수도 있고, 마음 한편에 마련된 고요한 공간일 수도 있다. 동네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시거나, 이어폰을 꽂고 음악에 집중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오직 ‘나’에게 마음을 고정할 수만 있다면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못 견디겠다면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짤막한 안부를 묻는 것으로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좋다. 종이 위에 글로 쓰면서 고민을 풀어 놓거나, 지금 원하는 게 무엇인지 헤아려 볼 수도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와 함께하고 싶다면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또 한 명의 나를 만들어서 옆에 나란히 앉아 있거나, 어깨를 기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다소 엉뚱한 이 시도들은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절대 혼자가 아니란 것을 상기시켜준다. 이런 시간들이 쌓이고 또 쌓이면 자연스레 자신이 사랑과 관심을 받는 소중함 존재란 걸 느끼게 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삶을 지탱해주는 자존감이라고 생각한다. 내면에서 다져진 뿌리 깊은 자존감은 쉽사리 꺾이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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