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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아티스트 유유 Mar 28. 2019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나에게 집중했다

스물아홉 살에 독립을 선언했다





부모님이 하루가 멀다고 싸우더니 엄마가 짐을 쌌다. 하루아침에 아파트에서 언덕배기 낡은 집으로 이사했다.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가면 담벼락 끝에 우리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열여섯 터울의 동생은 아빠를 찾았지만 엄마와 나, 동생, 이렇게 셋뿐이었다. 집은 열 평이 채 되지 않았다. 엄마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문을 등진 채 골방에 앉아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중소기업 경리부에 취업했다. 손 걸레질로 회의실을 닦고, “미쓰리!” 하고 부르면 달려가 서툰 차 시중을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사랑받고, 인정받으면 행복해질 거야.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견딜 수 있어. 그렇게 믿었다.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유난히 고된 날이었다. 회사에서 현금 입출금을 담당했는데 금고의 현금 시재와 장부 잔액을 맞추는 게 주요한 업무였다. 그날따라 백 원 차이로 잔액이 맞지 않아서 대리님한테 한 소리 듣고,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남아서 지문이 닳도록 돈을 셌다. 집에 도착하니 밤 열한 시. 피곤이 몰려왔다. 지친 표정으로 가방을 떨구자 엄마가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오늘 좀 힘들어서……”

변명을 둘러대듯이 내가 말했다.


 

“그깟 돈 좀 번다고 유세 떠냐?”

엄마가 성마르게 화를 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엄마가 화를 내자 주눅부터 들었다.



“아니, 오늘 늦게까지 일하느라고 힘들어서 그런다고.”

엄마는 꼴 보기 싫다는 듯이 몸을 반대쪽으로 틀었다.



“됐어, 너만 힘드냐? 너만 고생 하냐고.”

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참았다. 무슨 말을 해도 엄마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차마 뱉지 못한 말들이 달궈진 쇳조각처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렇게 십 년을 살았다. 가족을 지키려던 노력은 의무가 돼서 나를 옭아맸다. “이 돈 가지고 어떻게 생활하라고! 돈 나갈 데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희미하게나마 미안한 기색을 비추던 엄마는 언젠가부터 당당하게 돈을 요구했다. 점점 지쳐갔다.



“우리 딸 착하다. 고생했어.”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기 위해 치른 대가는 십 년.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긴 시간이었다. 만약에 나를 조금 더 소중히 아꼈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그렇게 긴 시간동안 자신을 방치하진 않았겠지. 어쩌면 일찌감치 집을 나가 독립을 했을지도 몰라. 그랬더라면 가족이 아닌, 날 위해 살았을 텐데. 조금만 더 나를 사랑했더라면…….  


    

한발 늦은 후회 속에서 깨달았다. ‘인정 게임’에 중독돼 있었다는 것을. “저 사람이 인정해주면 행복해질 거야!” 하고 믿는 순간, 인정 게임은 시작된다. 외부의 기준이 중요해지고, 자신보다 상대방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오로지 외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사랑과 인정. 그것은 헤어나기 어려운 중독이다. 게임의 대상은 비단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친구, 연인, 선생님, 직장 상사, 심지어 모르는 사람까지 게임에 끌어들였다.



게임의 규칙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는 이 게임에 셀 수 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배팅했다. 잭팟 터지듯 넘치는 사랑 받을 수도 있지만, 철저하게 외면당할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보다시피 승률은 형편없었다. “좋아! 이제 나를 인정해 줄 거지?” 하는 식의 예상은 늘 보기 좋게 빗나갔으니. 결정적으로 파혼은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환상을 단번에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관계의 무한 환상 속에 살았다. 가족은 영원한 울타리야. 친구는 영혼을 위로하는 존재잖아. 직장에서 인정받아야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지. 결혼이 미완의 인생을 완성할 거야.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 말이다. 이 순진한 믿음 때문에 인생을 저당 잡히고, 남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인정 게임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인생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누군가 도와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약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 자신밖엔 없었으니까. 익숙한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 위에 섰다. 쓰러지지 않도록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자신에게 집중했다.



그러자 삶이 변했다. 스물아홉 살에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나왔다. 서른 살에는 회사를 관두고,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수년에 걸쳐 경험한 자기 사랑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서른두 살 봄에 《소심토끼 유유의 내면노트》를 출간했다.



자신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미뤄왔던 대학원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 그해 겨울에는 일러스트 강의를 시작했다.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냐는 말이 무색하게 내가 좋아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1인 기업이 되었다. 쓰디쓴 파혼의 상처로 물들었던 해를 지금은 이렇게 기념한다. ‘진짜 인생이 펼쳐진 해’라고.


      

누구나 홀로서기가 필요한 순간과 맞닥트린다. 그 시기는 모두 다르지만 낯선 길 위에 설 용기가 필요한 건 똑같다. 가족과 연인, 친구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을까? 인정받지 못하면 낙오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맞설 수 있는가? 타인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은 갈망을 버릴 수 있을까?



선택은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치르게 될 대가는 한 번뿐인 소중한 나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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