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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아티스트 유유 Apr 25. 2019

파혼하고 6개월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새 나는 괜찮은 척 연기의 달인이 돼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회사에서 늘 할 말을 미리 준비했다. 머리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인지 조리 있게 말을 잘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자기 사랑'을 실천하는 소모임에서도 예외 없이 할 말을 미리 생각해두었다.



“얼마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결혼도 취소됐고…… 그런데 헤어지길 잘한 것 같아요. 결혼했다면 더 힘들었겠죠. 지금은 내 맘대로 사진도 찍고, 동호회 활동도 하고, 좋아요. 또 다른 인연을 만나겠죠. 여기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많이 배워 가면 좋겠어요.”



특별히 흠잡을 데 없는 매끄러운 문장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파혼 이야기를 밝혔으니 솔직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고, 스스로 잘 극복하고 있다는 긍정도 엿보였을 것이다. 



“유미 씨는 말을 참 잘하는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삼십 대 후반의 그는 소모임의 진행을 돕는 스탭으로 나이보다 젊어 보여서 반듯한 청년의 인상을 풍겼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답했다.



“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정말 괜찮아요?” 



“네?”



나는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문제가 다 해결돼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겠네요.”



그가 다시 한 번 천천히 말했다.



“글쎄요, 저는……”



방금 전까지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던 나는 말끝을 누그러트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가지런한 문장들이 구겨지고, 조각났다. 가벼운 모욕감을 느꼈다. 그의 예의 바른 미소가 비웃음은 아닐까 의심했다. 왜 바로 ‘네, 정말 괜찮아요’ 하고 대답하지 못했을까. 바보같이. 쉬는 시간에 수다를 떨다가도 ‘지금이라도 아까 못한 대답을 해야겠어’ 하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괜찮다’는 말이 목에 걸려 소리 낼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말이 목젖을 울렸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이 맺혔다. 그제야 깨달았다. 파혼하고 6개월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혼을 하고 나서 평소보다 활기차게 지냈다. ‘언제까지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있을 수 없어.’ ‘내 미래를 스스로 선택한 거야. 잘했어.’ 이렇게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다이어트도 독하게 했다. 그사이 소개팅도 몇 번 받았다. DSLR 카메라를 새로 샀다. 동호회에 가입하고, 가을 출사도 다녀왔다. 



물론 속이 상하기는 했지만 파혼이 흠이 되는 세상도 아니고, 까짓것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안심했다. 봐봐, 다 괜찮아졌잖아. 그새 나는 괜찮은 척 연기의 달인이 돼있었다. 주변에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괜찮냐고 물어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날 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엉엉 울었다. 꽁꽁 감춰뒀던 상처들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가장 원망스러운 건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아파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깬 되바라진 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뿌리친 배신자, 구제받을 수 없는 결혼 실패자니까. 



새벽까지 울다 지쳐서 거의 탈진상태가 됐을 때, 두 개의 갈림길 앞에 섰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처럼 상처를 외면하고 자신을 원망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해볼 것인가. 여태껏 상처를 피해 멀리 달아나는 데에만 골몰했다. 지금은 상처를 마주해야하는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빈 노트 한 권을 펼치고 첫 줄에 이렇게 적었다. “좋아, 다 얘기해봐. 도망치지 않을게. 더 이상 모른척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마음 깊은 곳, 찢기고 헤진 그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내려갔다. 아픔이 한 줄 한 줄 종이 위로 떠올랐다. 말할 수 없었던 슬픔과 차마 고백하지 못한 죄책감도 떠올랐다. 그렇게 노트 스무 페이지를 가득 채울 무렵, 떨리는 손으로 이렇게 꾹꾹 눌러썼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 



마음 깊숙이 숨겨왔던 두려움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또 다른 손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너를 미워한대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끝까지.”



이날이 처음이었다. 진심이 담긴 사랑의 말을 나 자신에게 건넨 것이. 어느새 나는 나의 속 깊은 친구가 돼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더듬더듬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혼잣말이 쑥스러울 때는 노트를 펼쳤다. 연인과 속삭이는 사랑처럼 달콤하거나, 회사에서 받는 인정처럼 드라마틱하진 않았지만 매일 안부를 묻고, 하소연을 들어주고, 어깨를 토닥였다. 기쁜 날엔 같이 기뻐하고 슬픈 날엔 같이 울어주고 너무 분할 땐 베개를 팡팡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메마른 땅에 촉촉하게 물이 스며들 듯이 목말랐던 마음이 사랑으로 서서히 채워졌다. 늘 사랑을 찾아 밖을 헤맸다. 이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줄까? 아니면 저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줄까? 하고 두리번거렸지만 찾지 못했다. 



그러나 사랑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길에

한쪽 팔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유미야” 하고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에

깊은 밤 날 위해 흘리는 눈물에 사랑이 있었다. 

사랑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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