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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파니 Jun 02. 2023

친구 같은 아내라는 환상

어반스케치 수강(3)





어반 스케치 과제를 하면서 세상 쓸데없는 생각 하나 가 뽈록 돋았다.

꼭, 피그먼트 펜으로만 그려야 하나? 의문을 품고 강사님께 물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되도록 펜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펜이라면 볼 펜도 있으니 이번 과제는 이걸로 그려 볼까? 하고 책상 앞에 앉아 또 골몰했다. 피그먼트 펜과 볼펜은 느껴지는 질감 차이가 뚜렷하니 망설여졌다. 어쨌든 한번 손 대면 수정이 불가하니까.


피그먼트 펜? 볼펜? 결정장애를 일으키며 한 시간 넘게 허우적대고 있자니 뒤통수로 서늘한 기운이 엄습했다.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어정쩡함이 주는 설렘과 환희' 편에서 언급한 상황이 복붙 하듯 재현 됐다. 아내가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팔짱을 낀 채 '이번만 봐준다.' 살벌한 눈빛으로 무언의 경고를 하던. 그땐 청소를 안 해 아내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요번엔 거리낄 것이 없었다. 헤벌쭉 웃으며 아내에게 물었다.


"방이랑 화장실까지 청소 다 했는데... 왜? 더 시킬 거 있어?"

"그건 아닌데...."


아내는 '에휴...' 한숨으로 말을 잇고는 마냥 멍 때리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속 터진다 혀를 찼다.

 '생각 그만하고 일단 해!' 편에서 보험 일을 했던 'P'의 일갈 이후로 생각을 절제하고 행동하는 삶을 살고 있다 했지만 오십 평생 착실히 다져온 습관이 그리 쉽게 고쳐지겠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개과천선했다)

나에 대한 아내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 됐기에 작금의 고민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피그먼트 펜 대신 볼펜으로 그려 볼까 하는데, 완성하고 나서 볼펜의 질감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가늠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피그먼트 펜으로만 그리는 것도 경험적인 측면에서...."


"그냥 그려! 이 자식아!!" 아내가 말을 잘라먹고 버럭! 했다. 당혹스러웠다. 둘 사이에 애가 없어 내가 애를 대신해 철 없이 살아도 그렇지, '이 자식' 이라니!! 아무리 동갑이라곤 해도 부부로서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인데. 잠자코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남편으로서 엄중하게 한마디 했다.


"지금 그리려고 했어. 봐, 볼펜 들었잖아."


그리면서 생각했다.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같은 간지러운 욕도 못하던 아내가 나를 만나 많이 거칠어졌구나, 하고. 자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동창회에서였다. (2000년 당시 대유행을 했던 아이러브 스쿨 사이트를 내 또래 분들은 다 아실 거다) "한잔해." 먼저 들이댄 건 아내였는데 내게 연신 술을 권하며 친근하게 굴었다. 곁에 있던 친구가 날 가리키며 아내에게 물었다. 얘 아냐고. 아내는 쌩긋 웃으며 "몰라." 해맑게 답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같은 반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러지? 호기심이 들었다.

술을 먹다 보면 이리저리 섞여 위치를 옮기게 되는데 나와 아내는 마주 앉은 자릴 꿋꿋이 지켰다. 2차로 장소를 옮겼음에도 서로 마주 앉았다. 첫 만남이 거짓말인 양 우린 오랜 친구처럼 너무나 잘 통했다. 모임이 파 할 때쯤, 아내에 대한 호기심은 관심이 되어 있었다.


동창회는 자정이 넘어 끝났다. 아내 혼자 택시를 태워 보내는 게 내키지 않아 굳이 집까지 바래다줬다.(다른 속셈이 있던 건 아니다,라고 한들 믿지 않겠지만) 아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 앞, 가로등 아래 마주 선 우린 술자린 때 와는 다르게 어색했다. 반 발짝 정도 거리에서 아내를 잔잔히 응시하던 난, 간격을 좁혀 다가섰다. 안 그래도 큰 아내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이내 부끄러운 듯 시선을 회피하는 아내를 향해 천천히...... 핸드폰을 들이밀며 번호를 물었다.(생각하는 그것을 하려고 한건 절대 아니다,라고 한들 믿지 않겠지만)


그렇게 첫 만남에서 번호를 주고받은 우린 편한 친구처럼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5년 뒤 동창에서 부부가 되었다. 사는 동안 아내는 내게 가장의 책무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가장을 자처한 아내는 자기가 벌테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라며 독려해 주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힘들 때도 아내는 술친구가 되어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 "친구 좋은 게 뭐겠어."

진정한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데, 그런 존재를 평생 반려자로 맞이한 난,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분명했다. (나를 만난 아내는 필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듯)


이런 아내가 이제는 한계에 왔나 보다. 나의 우유부단과 이로 인한 경제적 무능을 지금껏 참아왔으니 그 속이 오죽했을까. 언제나 친구 같을 거란 믿음은 이기적인 환상이었다. '이 자식이' 아니라 '이 ㅅㄲ'란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아내가 중학교 동창회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그 당시 좋아했던 같은 반 남자애를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놈이 사정이 생겨 불참하게 되었다고. (아내가 나 한테 친하게 군 것도 놈을 기다리다 만취해서 술김에 그런 거라고) 만약, 아내가 놈을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결혼까지 했다면.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나랑 살 때와는 분명 달랐을 거다. 같은 그림이라도 피그먼트 펜 혹은 볼펜으로 그렸을 때가 다르듯 말이다. 아마도 남편의 넉넉한 경제력 안에서 아이도 낳고 단란한 삶을 살았을지도. 아내가 누렸을 행복을 빼앗은 듯 해 가눌 수 없이 미안했다.


3시간 만에 그림을 완성하고 아내에게 내밀었다. 아내는 피그먼트 펜보다는 볼펜의 질감이 더 좋다고 했다.

좀 전의 거친 모습은 말끔히 사라지고 다시 친구 같은 아내가 되어 조근조근 그림에 대해 조언했다.

펜으로 그린 그림처럼 수정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아내의 남은 삶만큼은 좋은 질감으로 살게 해 줘야겠단 다짐이 들었다. 그동안 아내가 했던 역할을 내가 하기로. 애 같은 남편에서 친구 같은 남편이 되어.


그림 속 집을 보며 아내가 물었다. 죽기 전에 이런 집에서 살아 볼 수 있겠냐고. 5년 안에 무조건 된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아내에게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 고민하다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지지리도 되는 일 없는 남자가 복권이라도 당첨시켜 달라며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되지 않자 남자는 신에게 온갖 욕을 하며 원망했는데, 신이 응답하길 "일단, 복권부터 사거라!"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처럼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지만 최선의 노력을 시작했다.

기존에 로또만 했다면 이제는 연금복권도 함께 하고 있다. 아내가 이 글을 보면 "으이구, 이 자식아!" 하겠지만 그림 같은 집에서 살기 위해선 지금은 이 방법뿐, 다른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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