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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파니 Aug 04. 2023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른다

잘 쓰겠습니다!





비가 보슬보슬 처연하게 흩뿌리던 어느 날.

사무용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날씨가 선사하는 멜랑꼴리 한 분위기에 젖어 8090 감성 곡들을 음미하고 있었다. 플레이 리스트의 열 번째 곡, 가수 이 상은의 '삶은 여행'이 흘러나오자 표현 못할 휑한 감정이 가슴을 채웠다. 차분히 눈을 감고 삶이 여행인 이유를 깊이 사색하고 있는데,


"실례합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떠 보니 왜소한 체구의 어르신이 공방 안에 들어와 계셨다. 헐레벌떡 일어나 맞이하는 내게 어르신은 깨워서 미안하다고 겸연쩍게 사과하셨다. 난, 졸았던 게 아니라고 완강하게 말하곤 입가에 침을 닦으며 방문하신 용건을 여쭈었다. 동네 주민이라고 밝히신 어르신은 목공을 배우기 위해 여러 곳을 알아봤다고 하시며 기본교육 과정과 월 회비에 대해 물으셨다. 그러면서 "기본 과정 없이 원하는 걸 바로 만드는 건 안 되겠지요?"라고 덭붙이셨다. 이런 문의를 가끔 받아 봤기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려는데, "그렇죠, 그건 안 되겠지요."라고 선뜻 말하시곤 쑥스럽게 웃으셨다.


"아니요. 되는데요."


가능하기에 고개를 가로저은 건데 오해하셨나 보다. 어르신은 놀란 표정으로 반색하시며 그래도 되냐고 재차 물으셨다. 당연히 된다고 확답을 드리곤 목재비와 장비사용에 따른 부대비용을 작품 건당 지불하는 방식이라 월 회비 또한 없다고 설명드렸다. 월회비 마저 없다는 대목에서 어르신의 표정이 해맑게 빛나셨다. 손수 제작을 원하셨던 분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곧이어 앞선 분들이 그랬듯 어르신도 물으셨다. 이렇게 운영해도 남는 게 있냐고. 어르신의 표정에서 내 형편을 걱정하는 진심이 전해졌다. 감사한 마음에 평소 보다 더 솔직하게 답해 드렸다.


"남긴 남죠. 얼마 안돼서 그렇지... 근데 다른 공방처럼 하면 안 하실 거잖아요?"


어르신은 부정도 긍정도 않으시고 멋쩍은 미소만 지으셨다. 같은 질문을 하신 분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이내, 바지 뒷 주머니에서 작게 접은 메모지 한 장을 꺼내 펼치셨다. 거기에는 삐뚤빼뚤 엉성한 선으로 무언가 그려져 있었는데 어르신은 알아볼 수 있겠냐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셨다. 난, 목공 8년 차로서 대략 형태만 봐도 감이 잡힌다 말하며 자신 있게 평상이라고 답했다. 어르신은 하아~! 탄복하셨다. (역시, 연륜에서 묻어나는 눈썰미를 무시할 순 없을터) 흡족하게 미소 짓는 나를 보며 함께 웃음 짓던 어르신은 그건 책상이라고 하셨다. (탄복이 아니라 탄식이었다)


다음날, 뾰루지 마냥 뽈록 튀어나온 것이 직사각형 도형을 받치고 있는 기묘한 그림을 바탕으로 도면 작업에 들어갔다. 어르신이 원하시는 형태와 사이즈를 3D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하니 그제야 상식적인 책상 형태가 완성되었다. 다음은 목재를 선택할 순서다. 어르신은 어두운 색감에 무게감 있고 단단하면서 가격 또한 저렴한 나무였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한마디로 값싼 고급목재를 원하신 건데. 난,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문채 눈만 껌뻑였다. 내 눈치를 살피던 어르신은 본인이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으셨는지, 또다시 쑥스럽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그런 나무는 없겠지요..."


애처롭게 알아서 수긍하는 어르신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툭 까놓고 여쭈었다. 갖고 계신 액수를 정확히 알려주시면 최대한 맞춰 드리겠다고. 쭈뼛 대시던 어르신은 늘 싼 것만 사서 쓰다가 큰맘 먹고 제작하는 거라고 하시며 퇴직 후 버킷리스트 첫 번째가 목공이라고 하셨다. 이해한다는 의미로 숙연하게 고개를 끄떡이던 난, 그래서 액수가 어떻게 되냐고 재차 여쭈었다. 그런데 어르신은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리시곤 이야기의 방향을 확 틀어 인생사로 진입하셨다. '잠깐만요! 먼저 액수를!' 하며 다급하게 말려 보았지만 이미 어르신은 학창 시절로 도착해 계셨다. ('나도 살아야겠다' 편에서 언급했던 귀에서 피가 날 상황이 불식 간에 엄습했다.)


학창 시절, 어려운 친구를 보면 기성회비(내 때는 육성회비였다)를 삥땅 쳐 도울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으며 싸움 실력 또한 출중해 7대 1로 싸워도 거뜬히 이겨 따르는 친구들이 넘쳤다고.(한 명을 상대로 어르신 패거리 일곱이 싸운 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의도치 않게 사고도 치면서 파란 만장한 10대 시절을 보냈지만 방년 18세에 정신 차리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들로 거듭났다고. 이후로 부모님 뜻대로 진학, 취업, 결혼을 해 남들처럼 살며 딸 둘을 낳았는데 손자를 원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아들을 하나 더 낳았다고. 가족을 위해 정신없이 살며 자녀 모두를 출가시키고 보니 어느새 환갑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고. (자녀분들 효심 자랑만 1시간 넘게 하셨다)

아내와 텅 빈 집에 남아 집안을 둘러보는데 본인이 사용하는 물건들이 죄다 낡은 걸 깨닫고 왜 그리 자신에게 인색하게 굴며 살았는지 후회됐다고. 단 한 번도 용기내어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싶은 거 맘껏 하며 살 거라는 말로 끝을 맺으시곤 쓸쓸히 미소 지으셨다. (2시간 넘게 말씀하신 내용을 최대한 압축했다. 다행히 귀에선 피가 나지 않았다.)


어르신 인생사를 듣고 나니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얘기를 오래 하신 연유로 목이 마르실 것 같아 위로하듯 시원한 물 한 컵 챙겨 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얼마를 갖고 계시는데요?"


어떻든 일이 먼저다. 어르신은 공감 어린 대답을 기대했다 뜨끔하셨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액수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허! 참으로 속상한 액수였다. 어르신을 난감하게 바라보며 말씀드렸다. 직접 벌목하셔도 그 돈으론 힘들다고. 결국, 그나마 저렴한 소나무 집성목을 선택해 이틀간 작업하여 책상제작을 마쳤다. 어르신이 원하신 목재는 아니었지만 작업 내내  '와아!' '오오!'를 연발하시며 즐거워하셨다.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른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한 대가로 어르신은 자녀들의 효도와 버킷리스트를 실행할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있는 반면, 내 의지대로 살아온 난, 어르신이 느낀 인생의 한 맺힌 후회는 없지만 더불어 자식도, 집도, 돈도 없다. (써 놓고 보니... 젠장! 없던 후회가 밀려온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책임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 아니던가. 후회를 만회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어르신과 내게, 침 흘리며 사색했던 노래 가사로 인생 2막을 응원해 본다.


어제는 날아가 버린 새를 그려 새장 속에 넣으며 울었지. 

이젠 나에게 없는 걸 아쉬워하기보다 있는 걸 들을 안으리. 

삶은 계속되니까. (삶은 여행 중에서)


* 어르신은 책상을 제작하고 남은 목재로 계획에 없던 스툴까지 아낌없이 만드셨다. 그런데 가져간다는 말씀만 하시고 2달이 넘게 공방에 방치하셨다.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제작하시곤 왜 안 찾아가실까? 어찌 보면 어르신은 책상의 필요보다 제작 행위에 대한 성취가 더 컸던 건 아닐는지. 기다리다 못해 어르신께 문자를 드리니 가죽공예와 한지공예를 배우느라 시간이 없다며 양해를 구하는 답변을 주셨다. 자기에게 열정을 다하시는 어르신이 실로 존경스러웠다. 이런 마음을 담아 정중히 답장드렸다.


"잘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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