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 연극 감독
여기저기 몇 번 언급되었는데 사회학을 하기 전 나는 예술중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했었다. 그렇다면 예중 입시 전에 어쩌다 발레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그 시작점에는 뮤지컬이 있다. ㅎ 노래와 춤이 빼어났다기보다는 무대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노는 에너지(뒤쪽에 밝혀지겠지만 말 그대로 냅다 뛰어다녔음)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분리 불안이 심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엄마 약국이 1층, 같은 건물 4층에 집이 있었는데 계단을 혼자서 오르내리는 걸 못할 정도 두려움이 컸었다. 심리적인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엄마가 선택했던 대안은 어린이 연극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동네는 성내동이었고 프로그램이 이루어지는 연극 학교는 저 멀리 -- 족발이 유명한 ㅋㅋㅋ -- 장충동.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친구 서너 명과 뒷좌석에 찡겨 수다를 떨며 남산 터널을 지날 때에는 숨 참기 게임을 하며 오랜 시간 운전을 견뎌냈다. (라이드는 엄마들이 돌아가면서 했던 듯 ㅎ)
스튜디오에 가면 초록색 매트를 깔아놓고 앞구르기, 뒷구르기, 옆돌기, 인간 뜀틀 넘기도 했고, 택견이랑 탈춤도 배워보고, 아리랑도 부르고, 복식 호흡도 하고, 인형극에 쓰이는 인형들도 움직여보고, 2명씩 짝을 지어서 파트너를 전적으로 믿고 눈 감고 뒤로 넘어가는 게임 등 했었다. 이렇게 1년 가까이했었나, 연극 프로그램 마지막에는 발표회가 있었다. 발표회를 위해서는 대본극/인형극/뮤지컬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나는 뮤지컬을 선택했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장난감 가게의 인형들이었다. 층층이 치마를 양손으로 잡고 '안녕, 나는 춤추는 인형이야.' 몸을 숙여 인사를 하고 빙그르르 돌았던 것이 연극 무대에 대한 첫 기억이다. 발표회가 끝나고 몇몇 학생들에게는 극단에서 정식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 초대장이 주어졌는데 당시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니까 상당히 어리바리했을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에게도 영광스러운 초대장이 주어졌다. 꺄~
연극을 통해 분리 불안은 완전히 극복하게 되었다. 엄마가 약국을 하느라 라이드를 해줄 수는 없으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우리 집에서 장충동까지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했다. 813번 버스를 타고 성내역에 가서 2호선을 타고 쭉 가다가 동대문 운동장 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 충무로 역에서 내리고 다시 3호선으로 갈아타서 한 정거장을 가면 동대입구 역이 나왔다. 지하에서 계단을 걸어 올라오면 태극당이 보이고 골목으로 들어가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빌딩 하나가 나오고 그곳의 지하로 걸어가면 목적지이다. 핸드폰도 없던 1994년, 지금 나의 첫째 아이보다 어렸던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이 길고 긴 여행 (왕복으로 치면 이동시간만 한 3시간ㅋ)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연극 활동을 재밌어했다.
입단한 지 1년 뒤 정기공연 '홍길동'을 예술의 전당이라는 큰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주인공은 주로 언니 오빠들이 맡았던 것 같고 막내 그룹에 속한 나는 극의 중간중간 노래랑 율동을 하는 코러스 팀을 했다. 내가 맡은 역할 중 유독 인상 깊은 건 홍길동이 쏘아 올린........ 화살촉이다. 나 말고 화살을 맡은 꼬꼬마 단원 2명이 더 있었는데 우리는 화살의 뾰족한 앞머리가 달리 모자를 쓰고, 깃털 같은 화살 끝자락이 달린 바지를 입고 열심히 무대를 쏘아 다녔다. 그 후, 정기공연 '단군왕검'을 비롯하여, 오세암 인형극, TV 유치원에 나올법한 커다란 인형탈(이거 쓰면 진짜 답답함)을 쓰고 연기했던 짧은 극, 3.1. 절 독립선언문 재연 공연 등 돌이켜보면 극단을 통해서 재밌고 신기한 경험을 많이도 했었다.
연극이 좋았던 나는 엄마에게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고 뜻을 내비쳤다. 엄마가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데 그럼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에 발레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 발레를 시작하다가 발레에 빠져 뮤지컬을 그만두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나온 뒤 2-3년 뒤 IMF 타격으로 어린이 극단도 운영이 어려워져서 중단되어버림 ㅜㅜ)
서론이 길었지만, 이 글은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내가 다시 연극으로, 그것도 어린이 뮤지컬로 돌아오게 된 이야기다. 단서 수집 4번째 글에서 발레 티칭 포지션을 찾으러 다니다가 올해 5월 어린이 연극 센터의 교육 부장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했었다. 단순히 내가 둘째 딸아이와 들었던 영유아 발레 수업이 어린이 연극 센터의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었고, 그래서 센터장에게 보냈던 이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 레쥬메랑 이메일을 프린트해서 전달하러 갔었다. 그리고 막상 센터장을 만났을 때, 이런 제안을 받게 된다.
"지금은 댄스 클래스 자리가 없는데, 혹시 연극 감독 해보는 건 어때?"
1937년에 세워진 팔로알토 어린이 연극 센터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Playhouse. 4-6명 정도의 중고등학생 배우들과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 청소년들도 아주 바쁘신 몸이기 때문에) 2주간 짧굵!!!으로 협업하여 올리는 소규모 뮤지컬 공연이다. 관객의 연령은 2-6세 어린아이들로 게임과 율동, 노래를 하며 40분-50분 정도로 짧은 관객 참여형 연극을 제공한다. 나에게 제안한 건 중국의 중추절 (Mid-Autumn Festival) 관련 설화를 바탕으로 쓰인 것인데 센터에서 꾸준히 연극 활동을 해왔던 여학생 2명(중국계 미국인과 인도계 미국인)이 직접 대본을 썼고, 그 안에 들어간 노래들을 작사작곡했다고 한다. 그 각본가들이 Plyahouse에 동양계 감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각본 작업을 해 나가던 터에 동양계 여성인 내가 뙇! 나타났으니 아직 10대이지만 극의 정식 각본가들의 요청을 적극 수렴하여 나에게 감독 자리를 제안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띠용용~ 웬 연극 감독?! 발레 선생님을 기대하고 갔다가 연극 감독 제안을 받으니 영광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 일단 센터장과 마주 보고 한참을 하하하하하! 웃었다. 조금 생각해 보고 답변을 드리겠다 말하고 건물을 나와 집으로 운전하는 길에 골똘히 생각했다. 하루에 2시간씩 오후 5-7시. 학령기 아동 2명을 키우는 우리 집에는 여러모로 프라임 타임. 하지만, 딱 2주! 아무리 힘들어도 아내가 새롭게 일을 시도해 본다는데 2주도 못 참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이건 하나님이 내게 맞춤형으로 주신 기회가 아닐까? 집으로 가서 파트너의 의견을 구하기보다는 일단 내 마음의 결정을 통보했다.
나, 연극 감독 해보려고 해.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Playhouse 2024-25 시즌에는 총 9개의 연극이 있는데, 원래 중추절/추석은 음력 8월 15일, 올해에는 9월이지만 내 작품을 첫 번째로 올리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기존의 감독들이 올리는 작품을 레페런스로 참관하고 내가 맡을 Chang'e and the Moon은 미국의 추수 감사절에 가까운 11월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9월에 잭과 콩나물, 10월에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서로 다른 2명의 (백인 남성) 감독님들의 리허설 과정에 일주일에 2번씩 참관했다. '목소리를 크게 해 줘'라는 부탁하는 말 한마디도 연극판에서 요청하는 말(Can you project your voice? Enunciate here. I want your voice to be louder/clear etc)이 다르니까 감독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노트해 나갔다.
그렇게 대망의 11월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감사하게도 (꼴랑 2주 일하는데) 여기저기에서 온갖 도움을 받아서 리허설과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첫째 아이랑 같은 축구팀이자 같은 반인 엄마가 여기저기 라이드 많이 해주고 나에게 부담주기는커녕 I am happy to help라고 응원해 주던 것, 둘째 아이랑 같은 반이면서 한국인 친구의 아버님이 우리 아이들 라이드도 선뜻해주시고, 우리 집 아이들과 성별/나이 조합이 맞는 가정에서 무려 2번씩이나 플데를 호스트 하며 아이들 4명을 돌봐주었기에 내가 일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어린 아기가 아니건만, 내가 자라나는 데에는 여전히 It takes a villege 온 마을이 동원되어야 했다.
사람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이번 경험은 너무나 재밌고 즐거웠다. 물론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복병의 순간들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감독이 처음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맨땅에 헤딩하듯 배워야 했지만 마음에 울림이 왔던 2가지는 아이들, 그리고 나 같은 초보자도 잠재력을 펼칠 수 있도록 상황을 전적으로 맡기고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청소년) 극작가들이 동양계 감독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면 동양계 감독을 섭외하고, 이야기에 나오는 옥토끼는 인형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놓으면 소품팀에게 부탁하여 토끼를 만들어 준다. (초보) 감독인 내가 무대에 블록을 4개를 놓았으면 좋겠다 제안하면 블록을 4개 배치해 주고, 엔딩씬에 동그랗고 큰 달이 떴으면 좋겠다고 하면 달을 매달아 주었다. 너의 아이디어가 좋다고, 어제보다 많이 늘었다고, 하나하나 해낸 부분에 대해 아낌없는 칭찬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그로 인해 점차 발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배우들은 10대이지만 프로처럼 극을 이끌어갔다. 자기보다 어린 영유아 관객들에게 연극에 들어가는 노래와 율동을 가르쳐주고, 극에 들어가 있는 게임을 리드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듣는 이가 집중력을 흩뜨리지 않고 이야기에 경청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술은 꼭 배우 지망생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서머 캠프 때에도 느꼈지만 미국의 청소년들은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것과 동시에 타인과 소통하는 능력, 리더십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것 같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남들과 함께 협업할 때, 일터에서 일을 할 때 상대방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자세가 미덕임을 배웠다. 항상 겸손하게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성장해 가야지. 너무 재밌었던 이번 경험,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 어린이 연극과의 인연이 일회성이 아니라 오래오래 잘 펼쳐나가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