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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bari Apr 03. 2022

치유와 회복의 시간

소중한 꿈

  남편의 등 뒤에는 무거운 가방이 매달려 있었다. 오른쪽 어깨 위에는 검은색 노트북 가방이 들려 있었고 양손으로는 유모차를 힘껏 밀었다. 나는 막 100일이 지난 아기를 가슴에 안고 어깨에는 기저귀 가방을 메곤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의 이삿짐은 오직 이민가방 8개뿐이었다. 가방 안에는 가스용 압력밥솥과 냄비, 숟가락, 젓가락, 코넬 접시 5,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부엌칼, 아이들의 장난감 몇 개 그리고 기저귀와 옷가지가 전부였다.

  우린 젊다는 이유와 미래의 희망인 젊은이들을 돕겠다는 비전 하나로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케냐라는 나라로 출발한 것이다.

   2007년 케냐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 수집은 구글 나무 위키뿐이었다. 그렇게 6 18, 아침 6 15분 조모 케냐타 공항에 네 식구가 도착을 했다. 다행히도 선교회 선배의 도움으로 집을 얻고 적응해 갔다. 그해 케냐에서 셋째를 임신하고 이듬해 11월에는 보건소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보건소에는 의사가 아닌 수녀인 간호사들이 아기를 받았다. 특실 사용료는 하룻밤에 한국 돈 6원이었다. 주위에 한국 분들은 병원이 아닌 현지 보건소에서 아이를 낳았다며 나를 용감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지만 사실 생활이 녹록지 않았기에 선택한 곳이었다. 그러나 초라하다는 생각 보다는 감사하며 지내고 있다.


  한국의 많은 분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TV  후원 영상을 통해 접하다 보니, 생활은 미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나이 지긋한 분은 아프리카는 생활비 백만 원이면 다섯 가족이 쓰고도 남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나이로비는 치안이 좋지 않아 외국인들과 중상류층이 거주하는 지역이 따로 있다 보니 집세가 꽤나 비쌀 뿐 아니라 병원비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이다. 셋째가 만 4세에 나이로비 병원에서 복막염 수술을 했는데 병원비가 한국 돈으로 5백만 원쯤 나왔다. 한국 의사에게 이 말을 하자 기가 찬 듯 놀랬다.

  세 아이들의 국적은 한국이지만 사실 고향은 케냐이다. 한국은 조부모와 가끔 만나는 친척들이 있을 뿐이다. 물론 초등학교 때는 1주일에 1 케냐 한글학교를 다녔지만 한국에 대한 특별한 추억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두 번의 안식년을 한국에서 보냈다. 아이들은 이 기간을 통해 자신들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갖게 되었고 한국말을 잘할 수 있었고 한국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어느 해 한국에 대한 향수병으로 정신을 못 차렸다. 부모와 형제들이 그립고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분식점에서 먹었던 5천 원짜리 쫄면이 임산부처럼 미치도록 먹고 싶었고 코끝이 시리도록 추운 겨울이 그리웠다. 남편은 그 기간을 갱년기라고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남편은 맞다고 하는 갱년기는 다행히도 4개월 만에 끝났다. 그때쯤 벼룩시장에 올라온 ' 모임'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모임을 가기로 했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2019 8말이었. 첫 만남을 약속한 날 그녀는 밖이 아닌 자신의  주소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그녀가 산다는 아파트 메인 게이트 크기 가로와 세로가 3미터쯤이나  보였다. 입구에서 경비원이 1 검문을 하자 커다란 문이 '열려라 참깨'처럼 스르륵 열리더니 등 뒤로 슬며시 닫혔다. 주차장 초입에서 다시 2차 검문이 시작되었다. 경비원은 방문할 아파트 호수를 묻고는 내선으로 주인에게 연락을 한 후 출입 장부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마침내 신원 정리가 끝나자 경비원은 나를 그녀의 집 앞까지 안내했다. 마치 비싼 호텔에서 아주 특별한 사람을 만나러   같았다.

  아파트 벨을 누르자 문이 열리면서 귀여운 강아지와 함께 그녀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나보다 10살쯤은 많아 보였다.

  독서 모임은 12주라는 끝을 정하고 진행되었다. 한 주 동안 똑같은 단편 소설을 읽어 온 내용을 토론하고 써온 글을 나누는 식이 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남편과 아이들 없이 오롯이 나만을 위해 주어진 시간에 가슴이 설레었다.

  모임이 있는 날이면 나뭇잎에 내려앉은 햇살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고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나는 거울을 보며 곱게 화장을 하고 멋스럽게 옷을 차려 입고 향수를 뿌리곤 외출을 했다.


  폴리나 님은 차분한 성격에 경청을 잘하시는 분이셨다. 나는 그녀의 따스함과 편안함에 마음을 열고 아픔과 고민을 꺼내 놓았다. 한국이 아닌 타국 그것도 아프리카 땅에서 만 경험할 수 있는 동질감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숙제를 하기 위해 썼다. 그러나 어느새 글을 쓰면서 몰입이 되었고 노트북에 하얀 화면이 뜨면 글이 손가락을 통해 ‘따각따각튀어나왔다. 저수지의 수문이 ‘' 열린 것처럼 머리와 마음에서 글이 마구마구 쏟아졌다. 때론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감정들이 활자로 표현이 되면서 나 자신이 치유와 회복의 경험을 했다. 글을 쓰며 울고 웃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나는 글쓰기에 빠져 들었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글쓰기는 케냐 살이 15년 차인 나에게 새로운 목표와 시너지가 되고 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좀 더 너그러워졌고 사람의 내면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때론 노트북 한대만 있으면 내 삶이 외롭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폴리나 님은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나에게 선물을 주고 케냐를 떠났지만 코로나 팬데믹그녀는 지인들을 통해 수거한 책을 배편으로 보내 주며 관심과 응원을 보내왔다.  

  적도가 지나가는 땅에서 나는, 새로운 꿈을 향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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