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등 뒤에는무거운가방이 매달려 있었다. 오른쪽어깨 위에는 검은색 노트북가방이들려 있었고 양손으로는유모차를 힘껏밀었다. 나는 막 100일이 지난 아기를 가슴에안고어깨에는기저귀 가방을메곤비행기에 올랐다. 가족의 이삿짐은 오직 이민가방 8개뿐이었다. 가방 안에는 가스용 압력밥솥과 냄비, 숟가락, 젓가락, 코넬 접시 5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부엌칼, 아이들의 장난감 몇 개 그리고 기저귀와 옷가지가 전부였다.
우린 젊다는 이유와미래의 희망인 젊은이들을 돕겠다는 비전하나로한 번도방문한 적이 없는 케냐라는 나라로 출발한것이다.
2007년 케냐에대한 일반적인 정보수집은구글 나무위키뿐이었다. 그렇게 6월 18일, 아침 6시 15분 조모 케냐타 공항에 네 식구가도착을 했다. 다행히도 선교회선배의 도움으로집을얻고적응해갔다. 그해케냐에서 셋째를 임신하고 이듬해11월에는보건소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보건소에는 의사가 아닌 수녀인 간호사들이 아기를 받았다. 특실사용료는하룻밤에 한국 돈 6만 원이었다. 주위에 한국 분들은 병원이 아닌 현지 보건소에서 아이를 낳았다며 나를 용감한 사람이라고칭찬했지만사실 생활이 녹록지 않았기에 선택한곳이었다. 그러나초라하다는 생각보다는감사하며지내고 있다.
한국의 많은 분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TV 속후원 영상을 통해 접하다 보니, 생활은 미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나이지긋한분은아프리카는생활비 백만 원이면다섯 가족이 쓰고도 남을 것이라한다.그러나나이로비는치안이 좋지 않아 외국인들과 중상류층이 거주하는 지역이 따로 있다 보니 집세가 꽤나 비쌀 뿐 아니라 병원비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이다. 셋째가 만 4세에 나이로비 병원에서 복막염 수술을 했는데 병원비가 한국 돈으로 5백만 원쯤 나왔다. 한국 의사에게 이 말을 전하자 기가 찬 듯 놀랬다.
세 아이들의 국적은한국이지만 사실 고향은 케냐이다. 한국은 조부모와 가끔 만나는 친척들이 있을 뿐이다. 물론 초등학교때는 1주일에 1번케냐한글학교를다녔지만한국에대한 특별한 추억은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두 번의 안식년을 한국에서 보냈다. 아이들은 이 기간을 통해 자신들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확실히갖게 되었고한국말을잘할 수 있었고 한국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어느 해한국에 대한 향수병으로 정신을 못차렸다. 부모와 형제들이 그립고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분식점에서 먹었던 5천 원짜리쫄면이 임산부처럼 미치도록 먹고싶었고코끝이 시리도록 추운겨울이그리웠다. 남편은 그기간을 갱년기라고 말했다. 나는아니라고 남편은 맞다고 하는 갱년기는다행히도 4개월 만에끝났다. 그때쯤 벼룩시장에 올라온 '글모임'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단 한 번의망설임도 없이 모임을 가기로했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2019년 8월 말이었다. 첫 만남을 약속한 날그녀는 밖이 아닌 자신의집주소를 카톡으로보내왔다. 그녀가산다는아파트 메인게이트 크기는가로와세로가 3미터쯤이나돼보였다. 입구에서경비원이 1차검문을하자커다란 문이 '열려라 참깨'처럼 스르륵 열리더니 등 뒤로슬며시닫혔다. 주차장초입에서다시 2차 검문이시작되었다. 경비원은방문할 아파트 호수를 묻고는 내선으로 주인에게연락을 한 후출입장부에내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마침내신원정리가 끝나자경비원은나를 그녀의 집 앞까지 안내했다. 마치비싼 호텔에서 아주특별한 사람을 만나러온것같았다.
아파트 벨을 누르자 문이 열리면서귀여운강아지와 함께 그녀가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나보다 10살쯤은 많아 보였다.
독서 모임은 12주라는 끝을 정하고 진행되었다. 한 주 동안 똑같은 단편 소설을 읽어 온 내용을 토론하고 써온 글을 나누는 식이 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남편과 아이들 없이 오롯이 나만을 위해 주어진 시간에 가슴이 설레었다.
모임이 있는 날이면 나뭇잎에 내려앉은 햇살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고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나는 거울을 보며 곱게 화장을 하고 멋스럽게 옷을 차려 입고 향수를 뿌리곤 외출을 했다.
폴리나 님은 차분한 성격에 경청을 잘하시는 분이셨다. 나는그녀의따스함과편안함에 마음을 열고 아픔과 고민을 꺼내 놓았다. 한국이 아닌 타국 그것도 아프리카 땅에서 만 경험할 수 있는 동질감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처음글을 쓸 때는 숙제를 하기 위해 썼다. 그러나 어느새 글을 쓰면서몰입이되었고노트북에 하얀 화면이 뜨면 글이 손가락을 통해 ‘따각따각’ 튀어나왔다. 저수지의 수문이 ‘확' 열린 것처럼머리와 마음에서 글이마구마구쏟아졌다. 때론무의식 속에잠자고있던 감정들이활자로표현이 되면서나 자신이치유와 회복의 경험을 했다. 글을 쓰며 울고웃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나는 글쓰기에 빠져 들었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길어졌다.
글쓰기는케냐 살이 15년 차인나에게 새로운목표와시너지가 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좀 더너그러워졌고 사람의 내면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때론노트북 한대만 있으면 내 삶이 외롭지 않을수도있겠구나라는생각까지들었다.
폴리나 님은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나에게 선물을주고케냐를 떠났지만 코로나 팬데믹에 그녀는 지인들을 통해 수거한 책을 배편으로 보내 주며관심과 응원을 보내왔다.
적도가 지나가는 땅에서 나는,새로운 꿈을 향해책을읽고글을 쓰며 내 삶을풍요롭게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