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옷이 돌고 돌아서 아프리카로

옷 물려 입고 물려주기

by Bora

나의 옷장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옷이 뒤섞여 있다. 케냐는 봄과 가을이 없으니 날씨가 조금 싸늘하기라도 하면 반팔에 남방이나 스웨터에 스카프 하나만 걸치면 된다. 콜드시즌인 6~8월은 긴팔 옷을 즐겨 입는다. 물론 건조기라고 불리는 12~2월에는 주로 반팔을 입는다. 한국에 갈 때마다 다이소에서 사다 나른 핑크색, 초록색, 흰색의 옷걸이에 외출 복을 걸어 놓았다. 그리 좋은 옷들은 아니기에 웬만한 옷은 세탁기로 빨고 하늘하늘한 옷만 가끔씩 손빨래를 한다.


케냐는 물건뿐 아니라 옷과 신발까지도 중고가 널려 있다. 특별히 유럽에서 들어오는 구제품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 요즈음은 그나마 르키예에서 들어온 LC waikiki라는 옷 매장이 있어서 그곳에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지만 질도 안 좋고 십 대들의 옷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럼가 인근에 있는 토이(Toi)라고 하는 어마어마하게 큰 중고 마켓을 찾는다. 시장 초입에는 여행 가방과 신발들이 도로 가까이로 진열되어 있다. 마치 새것처럼 겉모양이 멀쩡하다 보니 가격이 시장 안쪽보다 세배 이상은 비싸다. 마치 한국의 5일 장에서나 볼 수 있는 길거리 마켓이 매일 열리고 있다. 길거리로 나온 옷들은 다림질이 잘되어 있어서 언뜻 보면 새 옷처럼 보이지만 한번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오면 후줄근하기 짝이 없다. 그럴 때마다 아차, 속았다 싶은 것이 싸게 산 옷 일지라도 속상하기 만 하다.


케냐의 시장 곳곳에서는 중고 옷과 신발이 팔리고 있다. 입던 옷을 깨끗이 빨아서 다림질을 하고 신발과 가방은 꼼꼼히 닦아서 시장으로 갖고 나가면 당장이라도 돈이 될 수 있다. 외국인이 운영하는 국제학교에서는 전후반기에 한 번씩 큰 가라지 시장이 열린다. 중고품을 자연스럽게 사고파는 나라에 살다 보니 나도 케냐에서 거의 새 옷을 산적이 없다. LC waikiki라는 곳에서 구입한 통바지는 길이와 허리가 너무 헐렁해서 1년에 한두 번만 입게 된다.

그런 내가 괜찮은 옷을 공급받는 일은 한국에 갈 때이다. 나와 몸이 비슷한 사람들이 물려준 옷은 멀쩡하고 재질이 좋다. 친한 분들은 신발과 가방은 물론 액세서리까지 챙겨 주신다. 나의 옷뿐 아니라 울 집의 세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거의 옷을 물려 입었다. 한국의 친척과 지인과 선후배분들은 우리에게 옷을 챙겨주면서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사계절의 나라에서 입었던 옷은 정말이지 멀쩡하고 깨끗하다. 그렇게 이민가방에 담아 온 옷은 주위에 계신 한국분들과 현지인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케냐에서도 나와 체격이 비슷한 분들에게 옷을 종종 물려 입는다. 특별히 한국에서 봉사팀이 올 때면 제주도에 사는 지인분이 입었던 옷을 공수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우리 가족이 두 번째 안식년을 제주도에서 1년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분이 참 멋쟁이셨다. 학원강사로 오랫동안 일하신 언니 같은 분의 옷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때부터 그녀에게 옷과 신발, 가방과 액세서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바로 전, 서울과 수원에서 온 봉사팀 편으로 우체국 박스 5호 사이즈에 물건을 5박스쯤이나 보내주셨다. 나의 옷장에 있는 옷은 80프로 이상은 제주도에서 온 것이다. 제주도에서 인천공항으로 그리고 카타르 도하를 걸쳐서 세 번의 비행기를 갈아타고 온 어찌 보면 비싼 옷인 셈이다.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다가 방글라데시아 공장에서 버려진 옷감들이 개천에 쌓이는 것을 보았다. 물을 먹어버린 수만 가지의 천이 썩으면서 각종 화학약품들이 수로를 타고 바다로 흘러가자 물고기들이 하얀 배를 드러내며 둥실둥실 또 올랐다. 수많은 물고기 떼들이 죽은 것이다. 그 옷들은 메이드 베트남이란 상표를 달고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었다.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옷 공장 주위의 개천이 옷과 온갖 쓰레기 더미로 뒤 덮인 것을. 그날 이후로 쇼핑몰에 가기라도 하면 때론 아이쇼핑으로 옷가게를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발은 쉽사리 가게 문턱을 못 넘어간다.

케냐 정부뿐 아니라 동부 아프리카는 자국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 외부로부터 구제품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물건이 계속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옷은 도대체 평범한 사람들은 구입할 수 없는 가격이다. 운전기사 한 달 월급이 한국돈으로 200,000원쯤 되는데 청바지 한벌이 5만 원이라니. 그러다 보니 중상류층 지역이 아닌 현지인들이 사는 동네의 로칼 시장에는 구제품이 널려 있다.


친구가 이사를 가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의 아들과 딸의 옷을 정리했다며 챙겨 주었다. 나와 두 딸들도 커다란 봉지 안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한두 벌씩 챙겼다. 사실, 대학생 선교를 하는 우리에게는 옷이 유용하다. 지난 일요일에는 학생들과의 미팅이 있었는데 종이봉투 안에다 괜찮은 옷을 골라서 넣고는 한 사람씩 뽑기식의 게임을 했다. 학생들은 아주 흥미롭게 봉투를 뽑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람이란 그 어떤 존재보다 고귀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린 안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면 그래도 나는 괜찮다. 사람마다 삶의 가치관이 다르므로 나는, 내가 선택한 삶이 한결 가볍다.


물려 받은 옷, 물려 줄 옷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