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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사진 속 나 (2)

by HONG

기계의 웅-웅거리는 낮은 소리를 들으며 눈부신 빛에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이내 기계음이 사라지고 낯설지 않은 소란스러움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희다. 죽었던 선희가 내 앞에 있었다.

선희는 말간 얼굴로 웃으며 나를 불렀다. "너 지금 표정 진짜 웃긴 거 알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놀란 눈으로 선희를 가만히 쳐다보다 다급하게 선희의 손을 훔쳐쥐었다.

선희는 나에게 말도 없이 낚아채진 오른손을 얌전히 내어주며 말했다.

"아야야... 왜 이래 갑자기 하여튼 넌 진짜 이상해"

나도 모르게 세게 쥔 선희의 손에 내가 남긴 하얀 손자국이 남았다 이내 내가 놓아주자 제 색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손바닥에 전해진 따뜻한 온기가 어쩐지 믿을 수 없이 선명해 아리게 느껴졌다.

다른 친구들 중 한 명이 그런 우리를 가만히 보더니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쟤가 예전부터 선희만 졸졸 따라다니긴 했지, 같이 본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좀 서운해?"

"누가 더 친하고 안 친하고 가 어딨어~ 유치하게~"

선희는 움켜쥐어졌던 오른손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 하며 친구의 질투 섞인 질문에 웃으며 받아치곤 이내 다른 친구들과 즐겁게 대화하기 시작했다.

[사진 한 장과 혈액 한 방울로 원하는 때에 잠시동안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헤모리 카메라의 광고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며 각자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래, 원래도 나는 딱 이 정도의 존재감이었지.

나는 사진 속에서 마치 아직 스캔되지 않은 인물처럼 가만히 앉아 다른 친구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우리는 선희가 카메라를 사 왔던 그날부터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매달 모임을 가졌었다.

선희는 덕분에 친구들끼리 사이가 더 돈독해지는 것 같다며, 어쩌면 자기의 병도 아주 나쁜 건 아니라고 웃으며 농담하는 선희의 말이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혈액에 담긴 그녀의 데이터가 마치 그녀처럼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는 선희가 죽고 나서도 끝내 다른 친구들과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이 싫었던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친구들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때마다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갑갑해지곤 했다.

그래서 선희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날에는 일부러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다 선희보다 늦게 모임에 참석하곤 했었다.


갑자기 모임의 누군가가 신세한탄을 하자 선희는 가만히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위로해 주었다.

그래 선희는 항상 그랬었지. 그 점이 항상 부러웠었다. 잔잔한 바다같은 사람.

스캔되어 있는 그 날의 하루가 재생되는 걸 가만히 바라보다 갑자기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공간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어지러운 기분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완벽하게 재현된, 하지만 전혀 기억나지도 않는 그날의 밤하늘과 찬 공기가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네"

고개를 내렸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검은 코트와 깨끗한 하얀색 바지를 입은 내 또래의 여자가 내 앞에 서있었다.

그녀는 내가 마치 자신을 기억하기를 기대하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기억 안 나? 그럴 수도 있지. 나 지수야"

나는 어벙벙한 표정으로 가만히 자신을 지수라고 소개하는 여자를 쳐다만 보았다.

"애들 다 와있는 거야?" 나의 표정에 개의치않듯 여자는 나에게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우리 모임에 이런 애가 있던가...? 나는 기억을 쥐어짜내며 속으로 모임의 친구들을 세어보았다.

가만히 세어보던 도중 자신을 지수라고 말하는 여자가 대뜸 나에게 팔짱을 끼는 바람에 세어보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모임장소에 여자와 함께 다시 들어가자 친구들은 반갑게 지수라는 여자를 맞이해 주었다.

모두들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니 새하얘진 머릿속이 도무지 복구가 되지 않아 멍하게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모임에 저 지수라는 아이는 없었다. 친구들을 바라보며 과거를 복기하고 있다 보니 서서히 주변의 모든 색채가 사라지고 점점 회색빛이 도는 게 느껴졌다.

돌아갈 시간이구나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벌써 두 시간이 흘렀던가? 이윽고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어버린 친구들과 선희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방 안에는 탄내가 아직 조금 남아있었다. 나는 기계에서 나와 사진첩을 급히 뒤져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자신을 '지수'라고 칭하던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기계의 오류일까 싶어 회사에도 전화해 보았지만 등록되지 않은 생체정보가 재생되는 일은 없다고 못 박을 뿐이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말갛던 인상 검은 머리가 더욱 검게 보이는 하얀 피부까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봐도 내 주변에 그런 여자는 없었다.

나는 다른 사진을 꺼내 콘솔에 올려놓고 스캔을 시작했다.


"너 또 멍 때리니?" 지수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어? 아... 아니.. 안녕?"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바보같이 인사를 건넸다.

"갑자기 안녕은 뭐야~ 또 딴생각하고 있지?" 지수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웃어 보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 기억 속에도, 사진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대화하며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상황 자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선희와 함께했던 우리가 그리웠던 것뿐인데 온통 내 정신은 자신을 지수라 말하는 그 여자에 꽂혀있었다.

신년의 분위기가 막 가라앉은듯한 가게의 분위기와 친구들의 상기된 목소리 그리고 선희의 웃음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그녀가 오히려 나보다 더 이 자리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지수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아직도 기억이 안 나는가 봐?"

스캐너에 들어가기 전에도 수없이 사진첩을 확인했음에도 이상하게 나는 지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 그러게 내가 기억력이 좀 안 좋아서..."

"다른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본다고? 이미 나 자신보다 더 이 모임에 더 적절하게 섞여 들어간 존재에 대해 물어보면 친구들이 이상하게 느낄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수는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지수는 나에게만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서 말고 현실에서"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스캐너에 들어간 나 말고는, 누구도 이 상황이 저장된 정보를 기반으로 재생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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