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되도록이면 독백은 쓰지 마세요. 드라마는 행동으로 씬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 드라마를 만들어 갑니다.
/ 대사빨만 날리려고 하지 마세요. 대사 문어체로 쓰지 마세요. 일상 속에서 하는 말들을 쓰세요.
쓰고 직접 말해보세요. 어색한지 안 그런지 직접 해보세요.
/ 보여지는 글입니다. 마스터베이션 같은 나만 만족하는 글 쓰지 마세요.
/ 에세이를 신파로 쓰지 마세요. 가을의 낙엽을 보고 쓸쓸해진다는 것은 진부합니다. 진부한 글 말고 감각적인 글을 쓰세요.
/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는 글 쓰지 마세요. 자기 소외가 일어납니다.
어떻게 쓰지 말아야 하는지 배웠고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분명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도 배웠는데 어떻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들만 수두룩하게 떠올라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자꾸만 망설여진다. 이렇게 써도 안될 것 같고 저렇게 써도 안될 것만 같아 불안해진다.
좌 <자기앞의 생> 로맹가리, 우 피카소 femme au beret rouge a pompon
마르셀 뒤샹 <샘>
보편과 고유사이
많은 글쓰기 강의에는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쓴다>라는 전제이다. 쓴다라는 전제 하에 잘 쓰는 글 못쓰는 글이 나뉘는 것이다. 일단 써야 잘 썼는지 못 썼는지 평가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빈화면을 보며 쓰지 못하고 망설였던 시간들이,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글쓰기의 방법은 <쓰여있다>라는 전제부터 시작될 것이 아니라 <쓰여있지 않다>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창작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좋은 창작물과 좋지 못한 창작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은 있을 수 있겠지만 좋은 글과 좋지 못한 글을 분류하는 기준이 정말 객관적일 수 있을까? 객관적일 수 있다면 얼마만큼 객관적일 수 있는 걸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창작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그 평가들이 얼마나 개인적인 취향이나 선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며 창작에 대해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있는 것이라면 좋은 글과 나쁜 글이 아니라 사랑받는 글과 사랑받지 못하는 글이지 않을까
그 시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 시대 이후에 사랑받는 작품들은 무수히 많다. 또 기준을 거부하기 위한 마르셀 뒤샹의 <샘>은 어떤가. 피카소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입학한 그림학교를 두 번이나 그만두었다. (그가 그림학교를 그만둔 것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란 가명으로 <자기 앞의 생>이라는 소설을 출간하고는 조카에게 에밀 아자르를 연기하게 했다. 그는 권총으로 자신의 입안을 쏘고 자살했는데 유서에서 에밀 아자르가 자신이었음을 밝히고 문학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상을, [하늘의 뿌리]로 콩쿠르상을 수상한 이후의 작품들에 비판이 이어졌는데 가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은 또 엄청난 찬양을 받았으니 에밀 아자르가 자신인 것을 자기만 알고 있었던 로맹가리로서는 참 씁쓸했을 것이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 씨는 과거 <목욕탕집 남자들> <사랑이 뭐길래> <부모님 전상서><사랑의 덫> 등등 무수한 히트작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이제는 대가족이 등장하는 가족극이 공감을 받기는 어려워졌다. 그러나 과거에는 엄청난 사랑을 받던 드라마들이었다.
시대마다 기준이나 보편은 달라지며 그렇기 때문에 잘 그린 그림, 못 그린 그림으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사랑받은 그림, 그렇지 못한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지 모른다. 잘 쓴 글 잘못 쓴 글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사랑받은 글, 그렇지 못한 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른다. 기준. 보편. 보통. 에 부합하는 창작물은 좋은 창작물이고 그렇지 못한 창작물은 나쁜 창작물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더 다양한 창작물들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보편과 기준을 거부하는 일이며 나아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덧씌워지는 보편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기준과 보편이라는 굴레는 예술가에게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 애쓰는 대신, 나만의 고유한 길을 가려고 한다. 왜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왜 받아들여지기 위해 나를 편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꾸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고독할지라도 나만의 길을 가려고 한다. 어딘가에 담기지 않고 자유롭게 여기저기 흘러 다니면서 살고 싶다. 마이너적으로 살고 싶다.